[배학수의 문화풍경] 비틀거릴 자유… 디지털 시대 칸트의 전언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스마트폰·디지털 알고리즘 의존 심화
스스로 알고자 하는 결단 부재의 시대
미성숙 상태 탈출하려는 의지 필요해
4월은 '칸트의 달'이라 불러도 좋다. 1724년 4월 22일, 발트해 연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임마누엘 칸트는 규칙적 일상에 갇힌, 다소 따분한 학자로 흔히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정신의 판을 뒤흔든 급진적 혁명가였다.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계몽'이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도그마에서 정신을 해방하고, 이성 위에 사회를 재건하려는 운동이었으며, 칸트는 이것을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로부터의 탈출"이라 정의했다. 계몽은 지식의 양이나 질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겠다는 의지의 문제다. 미성숙의 사슬을 끊고 자립하라는 칸트의 준엄한 명령이 바로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 알고자 결단하라)이다.
시대에 대한 칸트의 진단은 따끔한 심리학적 통찰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알고자 결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스스로 생각하려 하지 않고 보호자의 말을 따른다. 성인 역시 스스로 판단하는 책임 대신 타인에게 의존하는 편안함을 선택하곤 한다. '스스로 알고자 하는 결단의 부재'가 곧 칸트가 경계한 미성숙의 본질이다.
이 상태를 고착시키는 주범은 '게으름과 비겁함'이다. 1784년 칸트가 남긴 한 문장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돈만 지불할 수 있다면, 나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는 돈이 지적 노력을 면제받는 수단으로 전락했음을 꼬집었다. 우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사고, 결혼·직업·투자와 같은 삶의 결정을 대신 내려줄 '후견인'에게 기꺼이 비용을 지불한다. 영적 번뇌는 목자에게, 신체 관리는 의사에게 떠넘기며, 홀로 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할 '비틀거림의 공포'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치는 것이다.
안전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칸트가 말하는 '가축'이 된다. 후견인들은 이 '순한 생명체들'이 '보행기' 없이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도록 공포를 심어준다. 홀로 걷는 위험은 사실 허상이다. 몇 번 넘어져도 결국 걷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비틀거림에 겁을 집어먹은 우리는 다시 후견인의 품으로 도망치고 만다.
오늘날 칸트의 경고는 주머니 속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과거의 후견인을 두 가지 강력한 대체물로 바꾸어 놓았다. 첫 번째는 스마트폰에서 작동하는 구글이나 AI 기업의 '디지털 알고리즘'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구독료와 데이터를 지불하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리즘이 대신 결정해 주는 편리함을 누린다. 두 번째는 인플루언서와 온라인 컨설턴트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추종하며 스스로 연구하는 수고를 덜어버린다. 두 경우 모두, 안락함을 위해 사유의 주권을 양도하고 있는 셈이다.
주권을 넘겨받은 이들 새로운 후견인이 우리를 지배하는 수단은 칸트가 말한 '강령과 공식'이다. 1784년에는 이것이 교회의 교리였다면, 2026년 오늘날에는 인터넷의 완성형 답변들이다. 디지털 스트림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족쇄가 되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퇴화시킨다. 결국 우리는 '디지털 보행기'를 잡고 걸으며, 독립적인 판단을 두려워하는 '겁쟁이 기계'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적인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칸트는 무정부주의적 반란이나 고립을 제안하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검색 엔진과 전문가의 조언 없이 살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칸트는 '이성의 공적 사용과 사적 사용'을 구분해 지적 태도에 차이를 둘 것을 요구했다.
칸트의 공·사 개념은 흔히 쓰는 개념과 정반대이다. '이성의 공적 사용'은 국가 기관이나 공공 부문에서 이성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지성인으로서' 세계 시민이나 독자 세계를 향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자유로운 소통의 장을 말한다. 반대로 '사적 사용'은 국가나 조직이 부여한 특정한 직무나 직책(공무원, 군인, 은행원 등) 내에서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계처럼 작동하고,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모든 개인은 동시에 '지성인으로서의 자질', 즉 지성적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지니고 있다. 이 '이성의 공적 무대'에서 우리는 지성인으로서 스스로 생각하고, 공동체의 질서와 구조에 대해 비판적 담론에 참여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우리 시대의 '보행기 끈'은 디지털 인터페이스 속에 촘촘히 엮여 있다. 그러나 칸트 탄생의 달인 4월은 인간의 존엄성이 자율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상기시킨다. 지금이야말로, 오래된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사페레 아우데!" 보행기 없이 걸을 수 있는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