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햄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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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매기 오파렐 소설 바탕으로 한 '햄넷'
아이 죽음이 걸작이 되는 과정 추적
예술로 죽음 수용 상실의 고통 극복

영화 햄넷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영화 햄넷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삶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죽음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상실은 준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남겨진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이어간다. 그러다 문득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매기 오파렐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햄넷’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슬픔이 어떻게 걸작으로 바뀌는지 추적한다. 먼저 영화는 16세기 영국의 한 시골 마을로 카메라를 돌려, 셰익스피어의 아내 아녜스의 시선으로 아들 ‘햄넷’을 잃은 시간을 복원한다.

사실 햄릿하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르지만, 영화는 그 익숙한 위상을 걷어낸다. 영화 속에서 그의 이름은 단 한 번 언급될 뿐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가 아닌 그저 ‘윌’로 둔다. 그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라틴어를 가르치다 우연히 ‘숲속 마녀의 딸’로 불리는 아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정을 일군 두 사람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평온하고 행복한 때를 보낸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영화는 행복한 가족 서사가 아닌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고 힘겨워하는 부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의 부재는 단순히 비극에 머물지 않고, 남겨진 이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깊은 슬픔에 잠긴 윌과 아녜스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를 비껴간다. 그의 위대한 유산이 아닌 감당하기 힘든 상실을 견디고 그것을 기어이 예술로 승화시켜 낸 부부의 시간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아들을 잃고 7년이 흐른 뒤, 윌은 연극 ‘햄릿’을 세상에 내놓는다. 셰익스피어의 죽은 아들로 기억 속에 잠겨있던 햄넷은 이제 우리 모두가 호명하는 이름 햄릿으로 무대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위대한 비극이 어쩌면 천재의 영감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 가정은 영화 내내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남는다.

영화에서 주목할 인물은 아녜스다. 그녀는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데 비탄에 빠진다. 슬픔은 점차 자기 붕괴로 이어진다. 울부짖는 순간보다, 울음이 멈춘 뒤의 공백이 더 깊게 남는다. 윌을 향한 감정 역시 단순하지 않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런던에 있었고, 그 사실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뒤틀어 놓는다. 사랑과 원망이 같은 자리에 머무는 감정을 아녜스는 분리하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인물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윌은 슬픔 앞에서 도망치듯 글에 몰두하는 인물이다.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마음을 글로 옮긴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질문은 덴마크 왕자의 독백이라기보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을 때 더 절실하게 울린다. 아녜스는 남편이 감히 아들의 이름을 연극 제목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예술은 한 사람에게는 견디는 방식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고통인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다른 슬픔의 언어로 부딪힐 때, 그 긴장을 스크린 너머로 느낄 수 있다.

영화 후반부, 글로브 극장에서 ‘햄릿’의 막이 오른다. 무대에 선 윌은 죽은 햄릿의 아버지 유령으로 등장해 차마 건네지 못했던 아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고한다. 아녜스는 그제야 남편의 의도를 알아챈다. 아들을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되살려 또 다른 생을 부여하겠다는, 작가만의 이별 방식이었음을 말이다. 아녜스가 무대 위 절망에 빠진 햄릿에게 손을 뻗는다. 극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두 사람은 비로소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예술이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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