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과거의 아닌 현재의 언어로 다가오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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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
근대 원형 남은 건물 적극 발굴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재탄생
지난 2월 통영 항남1번가길 개관
백 여년 역사 품은 4곳 매력 넘쳐
과거 아닌 현재의 추억으로 진행

1936년에 건립된 목조 가옥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채 통영다방으로 변신했다. 통영시청 제공 1936년에 건립된 목조 가옥은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채 통영다방으로 변신했다. 통영시청 제공

향남1번가길의 통영다방과 동진여인숙 전경. 통영시청 제공 향남1번가길의 통영다방과 동진여인숙 전경. 통영시청 제공

드라마, 영화에서 자주 사용하는 소재가 ‘타임슬립’이다. 과거 혹은 미래로 시간대를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미쉘린 스타 쉐프가 조선시대로 가서 뛰어난 요리 실력으로 왕과 사랑에 빠진다거나 현대 의사가 과거 시대에 떨어져 당시 없던 의술로 죽어가던 사람을 살리며 사건에 휘말리는 드라마 등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일명 ‘시간 여행자’로 불리던 이들은 영상 작품 뿐만 아니라 문학 소재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2026년 현재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시간대를 이동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지 과학적인 설명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시대를 넘나드는 마법 같은 상황에 대한 꿈을 꾼다. 아직 타임머신은 발명되지 않았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대한민국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지난 2월 통영시는 100년 전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는 ‘근대역사문화공간’을 시작했다. 국가유산청의 지원을 받아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건물을 정비해 문화공간으로 변신시켰고, 공간을 이어 근대역사문화의 길도 만들었다. 서민들의 삶을 함께 한 공간에선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항남1번가길은 100여년 역사를 가진 건물들이 돋보이는 통영근대역사길로 지정됐다. 김효정 기자 항남1번가길은 100여년 역사를 가진 건물들이 돋보이는 통영근대역사길로 지정됐다. 김효정 기자

■ 근대역사문화공간을 아십니까

국가유산청은 지난 2018년부터 공간 단위로 국가등록문화유산을 적극 발굴·보존·활용해, 근현대문화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동시에 지역 활성화 핵심 축으로 조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 해방 이후까지의 역사를 담은 건축물, 도시 구조를 보전 활용한 지역으로 문화콘텐츠를 통해 역사와 문화적인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도록 지원하고 있다.

2018년 목포를 시작으로 군산, 영주, 익산, 영덕이 선정됐고, 통영은 6번째로 지정받았다. 통영시 항남동과 중앙동 등 원도심 1만 4000㎡ 곳곳에 남아 있는 국가등록문화유산 8곳과 등록문화자원 9곳 등 총 148필지가 사업 대상이다.

우선 항남1번가길에 모인 4곳의 근대 건물을 정비해 ‘통영 근대역사길’이라는 이름으로 2월 대중에게 공개했다. 김상옥 기념관, 통영 카페, 동진여인숙, 통영근대사진전시관이 첫 시작이다. 통영시는 올해 말까지 3곳을 더해 7곳으로 늘릴 계획이며 내년 초 1곳을 더 개관해 8곳으로 완성하게 된다.

근대역사길 사업을 진행한 통영시 문화예술과는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의 특징은 복원된 건물들이 단순한 '전시'에 그치지 않고, 창작과 교류, 체험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공간의 가치는 더욱 깊어지고, 골목에 쌓인 시간은 오늘의 삶과 겹치며 입체적인 서사를 만들어낸다. 중앙동∙항남동 일대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 자산들은 점처럼 흩어진 개별 자원을 넘어, 서로를 잇는 길과 면으로 연결되며 '걷는 도시'의 이야기로 완성된다”라고 설명했다.


김상옥 시조시인의 생가는 김상옥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통영시 제공 김상옥 시조시인의 생가는 김상옥 기념관으로 재탄생했다. 통영시 제공

김상옥 기념관 전경. 김효정 기자 김상옥 기념관 전경. 김효정 기자

김상옥 기념관 2층에는 김 시인과 활발히 교류한 윤이상 작곡가, 이중섭 화가의 사연을 만날 수 있다. 김효정 기자 김상옥 기념관 2층에는 김 시인과 활발히 교류한 윤이상 작곡가, 이중섭 화가의 사연을 만날 수 있다. 김효정 기자

김상옥 시인의 시조를 감상할 수 있는 음향 장치. 김효정 기자 김상옥 시인의 시조를 감상할 수 있는 음향 장치. 김효정 기자

■항남1번가길의 매력

항남1번가길의 특징은 4곳의 건물이 붙어 있어 한 번에 다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중 가장 많은 콘텐츠를 가진 곳이 김상옥 기념관이다. 1936년 목조 구조의 지상 2층 건물로 건립된 이곳은 초정 김상옥 선생이 태어나 자란 생가로 원형 그대로 보존됐다. 시조 시인 김상옥(1920~2004)은 통영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까지 격동의 시간을 건너며 삶의 감각과 언어를 시조의 리듬에 담아냈다.

기념관에는 김상옥 시인의 유품과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대표 시조부터 그림, 서예, 도자 작품뿐만 아니라 생전에 사용한 작업공간, 선생이 사용한 필기구와 노트, 붓도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2층의 한 방은 통영에서 김 시인과 교류했던 예술가들 이야기로 꾸몄다. 소설가 김경리,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중섭이 그 주인공들이다. 애틋하고 애련한 감정이 몰려온다. 윤이상과 김상옥은 일경에게 체포돼 여러 차례 옥고를 치렀고 함께 서울로 도망치기도 한다. 동백림 사건으로 윤이상이 고향을 떠나 독일로 망명할 때 김상옥은 직접 빚은 도자기를 주며 “이게 다 고국의 흙으로 빚었다. 고국이 그리우면 이걸 바라보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중섭은 김상옥 시인의 자택에 자주 드나들 정도로 교류가 많았다. 어느 날 김상옥 시인의 시집 출판회에 초대돼 시집 한 권을 받은 후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 날 김 시인에게 “나는 돈이 없어 축하금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림으로 가져왔다”라며 시집에 그림을 직접 그려주었다고 한다.

1936년에 건립된 목조 가옥으로 당시의 건축적 특성을 간직한 김양곤 가옥은 카페 '통영다방'으로 변신했다. 화장실이 집 밖에 배치된 구조와 건물 뒤편에 남아 있는 우물 등 근대 가옥의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메뉴도 이곳의 또 다른 매력이다.

동진여인숙 앞 모습. 현재는 게스트 하우스로 준비 중이다. 통영시청 제공 동진여인숙 앞 모습. 현재는 게스트 하우스로 준비 중이다. 통영시청 제공

동진여인숙 내부 공간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효정 기자 동진여인숙 내부 공간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김효정 기자

일제강점기 운영된 대흥여관은 통영근대사진전시관으로 변신했다. 통영의 서민들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 흥미롭다. 통영시청 제공 일제강점기 운영된 대흥여관은 통영근대사진전시관으로 변신했다. 통영의 서민들 생활을 담은 사진들이 흥미롭다. 통영시청 제공

통영근대사진전시관 내부 모습. 김효정 기자 통영근대사진전시관 내부 모습. 김효정 기자

스탬프가 부착된 구조물 4곳을 찾으면 ‘근대 네 컷’ 촬영권을 선물로 받는다. 김효정 기자 스탬프가 부착된 구조물 4곳을 찾으면 ‘근대 네 컷’ 촬영권을 선물로 받는다. 김효정 기자

통영다방 바로 옆에 있는 동진여인숙은 1940~50년대 여객선터미널과 버스터미널을 오가던 사람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이다. 당시의 공간구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체험형 게스트 하우스로 활용된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하룻밤은 과거로의 여행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구 대흥여관은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운영했던 2층 규모의 여관으로 통영근대역사사진관으로 변신했다. 역사적인 건물을 찍은 사진도 아니고 예술 작품도 아닌 그야말로 서민들의 생활을 담은 일상 사진이라 오히려 친근하게 보는 재미가 있다. 근대 의상과 신발, 모자, 당시 소품 등이 다양한 형태로 준비돼 있어 방문객의 취향에 맞게 착용한 후 '근대 네 컷'을 찍을 수 있다. 역사문화거리를 비롯한 인근에 4곳의 QR코드가 부착된 벽이 있다. 4곳의 QR코드를 모으면 ‘근대 네 컷’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

바다와 맞닿은 통영 역사길은 두 가지 소리를 품고 있다. 하나는 파도가 들려주는 현재의 리듬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남기고 간 발자국이다. 통영 중앙·항남동 일대 원도심은 그 발자국이 유난히 짙다. ‘함께 살아남기'가 곧 '함께 버티기'였던 시절, 이곳은 연대의 공간이었다. 틍영 근대역사문화공간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언어로 2026년을 사는 이에게 다가오고 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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