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와 감금의 경계… 동물원을 어떻게 봐야 할까?
■ 500번의 동물원 탐험/비두리
15년간 500번 방문 돌아본 인문 에세이
철창 뒤에 가려진 또 다른 생명체에 주목
직접 찍은 80여 장의 사진, 큰 울림 남겨
2009년 8월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찍은 돼지꼬리원숭이. 15년에 걸친 500번의 동물원 탐험이 시작된 이 순간을 저자는 '존재와 존재가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으로 규정한다. 효형출판 제공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한국 동물원 역사 100년이 되던 2009년 8월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찍은 사진 속의 주인공은 돼지꼬리원숭이이다.
이 작은 생명체가 한 청년을 15년 동안 500번이나 집요하게 동물원을 드나들게 만들 줄은 자신도 몰랐다. 사진가 비두리(본명 박창환)가 쓰고 찍은 <500번의 동물원 탐험>은 동물원을 통해 사고의 확장을 경험한 저자의 인문 에세이이자 대한민국 동물원 보고서이다.
잠시 2009년 당시를 저자의 시선으로 돌아보자. 사람을 닮은 이목구비, 그 속에서 빛나던 또렷한 눈빛. 초점 링을 돌려 셔터를 누르는 찰나, 나는 그 작은 생명체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카메라 뒤에 숨은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가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중략)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중략)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너의 이야기를 내가 대신 전해줄게.”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엄마를 잃고 인공포육장에서 성장한 오랑우탄 '보물이'가 빨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생각에 잠겨 있다. 2014년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촬영했다. 저자는 '보물이는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라는 설명을 붙였다. 효형출판 제공
그날의 약속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고, 기록으로 남았다. 비록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동물과의 약속이었지만 저자는 뚜벅뚜벅 카메라를 메고 실천에 옮겼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의 시선으로 계절과 시간, 그리고 자신의 감정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동물원의 얼굴을 포착했다. 그 과정에서 렌즈는 단순한 기록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 존재와 존재가 마주하고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시선이 바뀌면 똑같은 대상도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법이다. 어린 시절 소풍 장소로, 그리고 주말 가족 나들이 코스로 스쳐 지나갔던 동물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록자로서 시작된 동물원 방문이었지만, 그곳으로 향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저자는 동물원을 단순한 관람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세상으로 이해하게 됐다.
이런 저자의 인식 변화는 동물원에서 만나는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2018년 세상을 떠난 한국의 마지막 북극곰 ‘통키’, 인공포육장에서 사람 손에 키워진 오랑우탕 ‘보물이’, 반출 논란의 중심에 섰던 침팬지 ‘관순이’, 그리고 국민적 사랑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간 판다 ‘푸바오’까지. 저자의 렌즈는 자연스럽게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귀여운 외형이 아니라, 그들이 뿜어내는 ‘생명의 체온’에 주목한다.
'갈비뼈 사자'로 불리던 수사자 '바람이'의 2025년 모습. 청주동물원으로 옮겨진 뒤 건강을 회복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 효형출판 제공
코로나가 한창 창궐하던 2021년 여름, 김해시의 한 민간 동물원에서 발견된 수사자 ‘바람이’의 모습은 큰 충격을 불러왔다. 가죽을 뚫고 나올 듯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와 갈기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성긴 털이 축 늘어져 있는 사자를 본 저자의 충격은 ‘인간과 비인간 존재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갈비뼈 사자'로 불리던 바람이는 다행스럽게도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은 ‘민영 감옥’에서 구조된 뒤 청주동물원으로 옮겨져 새 삶을 누리고 있다.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공영 동물원인 청주동물원은 동물들을 위한 ‘요양원’ 역할을 하는 곳이다.
차가운 철창과 유리 벽이 가로막는 현실의 공간과 그 너머를 생각하는 뜨거운 심장 박동의 거리는 ‘동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혹은 ‘동물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으로 채워진다.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된 15년간의 기억과 기록이 ‘보호와 감금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동물원에 대한 사유로 확장된 것이다.
2012년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 촬영한 사막여우 두 마리. 저자는 보호와 감금의 경계 어딘가에 있는 동물원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묻는다. 효형출판 제공
특히나 순간순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저자의 글과 사진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동물과 눈을 마주친 순간의 떨림, 이름을 알게 되며 생겨나는 애정, 그리고 존재를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은 독자의 감수성까지 자극한다. 책이 ‘탐험’이라는 표제를 달았지만, 그 속에 담긴 저자의 사유와 80여 장의 사진이 단순한 동물원 탐험기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로 읽히는 이유다.
저자가 쉽사리 답을 제시하듯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지는 않는 건 이 책의 미덕이다. 동물원을 없애자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야생 방사를 요구하는 입장과 함께 종 보전과 교육의 장이라는 동물원의 순기능도 소개한다.
저자는 대신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동물들을 독자 앞으로 불러낸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인간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여러분은 동물과 함께 진화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비두리 글·사진/효형출판/408쪽/2만 1000원.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