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막이 없는 벤치에서 평등하게 공간 향유하는 시민들 [벤치가 바꾼 세계 도시 풍경]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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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 차를 비우고 사람을 채우다

베트남 하노이 호안끼엠 거리
2016년 ‘보행자 전용’ 지정
차 사라지자 ‘핫플레이스’ 부상
유동 인구 폭증에 상권 활성화

주말을 맞아 차 없는 거리로 변신한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주변 보행로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산책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호수변을 따라 배치된 벤치와 탁 트인 보행 공간이 ‘보행자 중심’으로 재설계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말을 맞아 차 없는 거리로 변신한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주변 보행로에서 시민과 관광객들이 자유롭게 산책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다. 호수변을 따라 배치된 벤치와 탁 트인 보행 공간이 ‘보행자 중심’으로 재설계된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 관광도시 부산의 보행 환경이 지역 고유성을 잃고 평면화되고 있다. 도시 재생 사업이 ‘볼거리’와 ‘놀거리’에 치중되면서, 정작 최소한의 휴식 인프라인 벤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페 등 상업 시설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는 도심 내 머무를 곳을 찾기 어려운 ‘휴식의 사유화’ 현상은 시민의 보행권과 도시 소속감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반면 세계 도시에서는 벤치를 단순한 거리 가구가 아닌, 공원 기능을 부여한 ‘거리 가구’로 활용하는 작업들이 한창이다. 〈부산일보〉는 총 3회에 걸쳐 국내외 사례 분석을 통해 벤치가 바꾼 도시의 삶을 조명하고, 부산 경관에 최적화된 ‘부산형 벤치 모델’과 걷고 싶은 도시를 향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매주 금요일 오후, 베트남 하노이의 심장인 호안끼엠 호수 주변에서는 ‘공간의 마법’이 펼쳐진다. 낮 동안 수만 대의 오토바이가 뿜어내던 매연과 날카로운 경적 소리는 순식간에 잦아든다. 호수 주변 왕복 4차선 차도는 차량 전면 통제로 거대한 광장으로 변하고, 그 자리는 시민들의 발걸음과 활기찬 대화 소리로 채워진다. 하노이시가 2016년 도입한 ‘보행자 전용 거리’는 단순한 교통 통제를 넘어, 자동차 중심의 도시를 사람 중심으로 되돌리겠다는 정책적 선언이었다. 〈부산일보〉 취재진이 찾은 호안끼엠의 주말은 ‘통행’이 아닌 ‘체류’가 도시의 표정을 어떻게 바꾸는지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팔걸이’ 없는 벤치, 경계를 허물다

차가 사라진 호안끼엠 보행자 거리에서 눈에 띄는 것은 호수를 둘러싼 벤치들이다. 이곳의 벤치는 화려한 곡선이나 복잡한 조형미를 뽐내는 ‘디자인 특화 벤치’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묵직한 석재나 나무로 제작된 단순한 일자형 구조가 주를 이룬다.

주목할 점은 ‘개방성’이다. 이곳 벤치에는 노숙인의 취침을 방지하거나 이용을 제한하기 위해 설치하는 팔걸이가 없다. 시민들은 벤치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거나, 호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길거리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낯선 이들이 나란히 앉아 거리 공연을 관람하고, 노인과 청년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이곳의 일상이다.

이는 소외를 목적으로 한 ‘적대적 건축’을 지양하고 모두를 품는 ‘환대적 건축’을 지향한 결과다. 칸막이 없는 개방형 벤치에서 시민들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평등하게 공간을 향유한다. 벤치가 단순한 공공 가구를 넘어 공동체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사회적 매개체 역할을 하는 셈이다.

차도가 사라지고 휴식 공간이 늘어나자 호안끼엠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베트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사진을 찍던 응우엔 호앙 린(18) 씨는 “SNS에서 호안끼엠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유행이라 2시간 거리인 푸토성에서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노년층에게도 이곳은 소중한 ‘사랑방’이다. 인근에서 60년을 거주했다는 즈엉 쑤언 투이(68) 씨는 이날 처음 만난 따오 티 뜩(86) 씨와 벤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투이 씨는 “벤치가 생기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많아졌고, 젊은 세대와 소통할 기회도 늘었다”며 웃어 보였다.

■느려진 거리, 살아난 경제

하노이 당국이 보행 공간과 휴식 시설을 확충한 것은 치밀한 경제 전략이기도 하다. 차가 사라진 자리에 개방형 쉼터가 들어서자 유동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하노이 당국에 따르면 이곳에는 주말 평균 2만 명, 공휴일에는 최대 4만 명의 인파가 모여든다.

사람들이 머물기 시작하자 주변 상권에도 활기가 돌았다. 호안끼엠 호수의 체류객들이 인근 ‘올드 쿼터’(구시가지)의 카페와 식당으로 유입되며 ‘체류가 곧 경제적 활력’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오자이를 입은 젊은 층을 겨냥한 꽃 장사가 성행하고, 나들이객을 위한 다양한 노점상이 들어서는 등 거리 자체가 거대한 시장이 됐다.

5년째 이곳에서 꽃수레를 밀고 있는 레 티 이엔(45) 씨는 “주말 매출이 평일보다 2배나 높다”며 “차 없는 거리가 생계에 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10년째 기념품점을 운영하는 란 아잉(37) 씨 역시 “보행자 거리 운영 이후 분점이 15곳으로 늘었다”며 “단순히 지나치던 사람들이 이제는 여유 있게 머물며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비워진 공간은 시의 수익 모델이 되기도 한다. 하노이시는 매주 주말 공간을 대여해 기업 팝업스토어나 문화 행사를 연다. 취재진이 방문한 날에도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s)’ 관련 행사가 한창이었다. 기업은 홍보 효과를 누리고, 시민은 매주 새로운 콘텐츠를 즐기며, 시는 임대 수익을 거두는 선순환 구조가 구축된 것이다.

하노이(베트남)/글·사진=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본 취재는 부산광역시 지역신문발전지원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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