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피어나는 생명, 마음의 무한을 그리다
부산 출신 길 후 개인전 ‘무량대수’
영도 스페이스 원지에서 선보여
서양화 재료로 동양 회화론 실천
죽음과 생명 경계 ‘블랙’ 철학 구현
인간 존재의 비극성·구원 드러나
“나를 감동시키지 못하면 없애야”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개막일에 맞춰 지난 12일 부산을 찾은 길 후 작가가 10년 만에 완성한 '마고'라는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김은영 기자 key66@
길 후, 무제(Untitled), Graphite on paper, 2025. 작가 제공
길 후 부산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전시장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부산 영도에서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서양화가 길 후(본명 김길후)가 부산에서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를 열고 있다. 지난해 8월 기장의 빌라쥬 드 아난티 컬처클럽 개인전 이후 1년 4개월 만이다. 서울 학고재 갤러리 전속 작가로, 중국 베이징과 대구를 오가며 꾸준히 작업해 온 그는 지난 12일부터 내년 2월 22일까지 영도구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 원지에서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화면에 응축한 신작을 선보이고 있다. 초기작 몇 점과 10년 만에 완성한 작품 일부도 포함했지만, 대부분 신작이다.
“작가의 자세는 창작에 대한 도전이잖아요. 새로운 작업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도전하는 게 작가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창작자이지 장인이 아닙니다. 피카소가 최고인 이유는 계속된 도전에 있다고 봐요.”
길 후 부산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포스터. 김은영 기자 key66@
길 후 작가는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개막일인 지난 12일 영도 스페이스 원지에서 아티스트 토크를 갖고 있다. 김은영 기자 key66@
전시 제목 ‘무량대수’는 인간의 감각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수를 뜻하며, 작가는 이를 ‘마음의 무한한 깊이와 파동’이라는 내면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캔버스에는 구체적 형상 대신 흐릿한 흔적과 사라지다 남은 질감, 빛과 어둠의 층이 남아 감정의 잔향처럼 화면을 채운다.
길 후의 회화는 ‘블랙’(black)에서 시작된다. 그는 검정을 ‘죽음과 삶의 경계선’ ‘빛이 나오기 직전의 어둠’으로 정의하며, 여러 겹의 칠 위에 브론즈와 스틸 물감을 스치듯 내리쳐 화면을 구축한다. 서양화의 재료(캔버스, 아크릴, 유화 등)를 사용하면서도 배접용 평붓을 무사의 칼처럼 휘두르는 몸동작은 동양적 회화론(화론육법)의 골법용필(骨法用筆)·기운생동(氣韻生動)을 현대적으로 실천하는 방식이다. 화면은 정지된 이미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기운이 진동하는 장으로 변한다. 때로는 그 붓이 종이에 구멍을 내기도 한다. 작가는 “마음속 흔들림을 붙잡기보다 그 찰나를 그대로 두려 했다”고 말한다.
아티스트 토크를 갖고 있는 길 후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개막일에 맞춰 지난 12일 부산을 찾은 길 후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길 후의 회화는 오랫동안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대한 탐구를 중심에 두고 전개됐다. 그는 수만 점의 작업을 거듭하는 동안 스스로 감동하지 않는 그림은 모두 폐기하며, “과거의 그림이 지금의 나를 움직이지 못하면 존재 이유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2000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그의 작품 1만 6000여 점을 불길 속에 내던져 버린 일도 있었다. 이후 그는 ‘블랙 페이퍼’로 작업하기 시작했다. “블랙 페이퍼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없고, 보관하기가 쉬워서 1000점을 해도 얼마 안 됩니다. 지금도 그림을 없애는 일은 반복해서 합니다.”
길후, 검은 눈물(Black Tears), Acrylic Ink on paper, 2003년. 작가 제공
길 후, 검은 눈물(Black Tears), Acrylic Ink on paper, 2001년. 작가 제공
길 후 부산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 김은영 기자 key66@
끊임없는 덧칠과 긁힘, 삭제의 과정을 거치며 화면에 남는 것은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변화 그 자체다. ‘현자’(賢者) 연작과 ‘검은 눈물’(Black Tears) 작업에서 보듯, 그의 작업은 인간 존재의 비극성과 구원을 동시에 품은 실존적 미학으로 읽힌다. “‘검은 눈물’ 시리즈를 할 때 미셸 푸코를 좋아했습니다. ‘파놉티콘’ 이론을 다룬 푸코의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을 읽고 감옥 시리즈를 그렸습니다. 나 자신이 감옥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감옥 시리즈의 한 테마가 ‘검은 눈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비극적이고 처참한 거예요.”
길 후 부산 개인전 ‘무량대수’(無量大數) 전시장에 설치된 작품. 김은영 기자 key66@
길 후의 일부 작업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조각처럼 입체감을 드러내며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흐린다. 두껍게 중첩된 물감과 물질 덩어리가 실제 오브제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표면은 시각과 촉각의 감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입체 작업에서 반복되는 ‘세 다리’(삼족) 구조는 균형과 불안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구조적 메타포로, 전통적인 ‘주조-완성’ 중심의 조각 개념을 해체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작가는 신화적 상징 해석을 경계하며, 형식 자체가 드러내는 긴장과 불완전성에 주목한다.
길 후, 무제(Untitled), Graphite on paper, 2025. 작가 제공
길 후, 무제(Untitled), Graphite on paper, 2025. 작가 제공
평론가 윤진섭은 길 후의 작업 태도를 두고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작가에게 매일의 그림은 단순한 생산이 아니라, 자신을 갱신하는 수행적 행위나 다름없다. “재작년에 그림 그릴 종이를 2만 장 구해 달라니까 독일 하네뮬레, 이탈리아 파브리아노, 영국 서머셋, 프랑스 아르쉬 등 전국에 있는 걸 다 가져와도 2만 장이 안 된다는 겁니다. 지금 7000장 정도 그렸는데, 2~3년 안에 1만 장을 해내고, 5년 안에는 2만 장을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담아내는 데는 오랜 축적이 필요하거든요. 그럴수록 다양한 작업을 해야 합니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