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겨울철 혈액 보릿고개를 넘으며
박영화 부산혈액원 공급팀장
매서운 바닷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본격적인 겨울이 부산에 당도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지만, 부산혈액원 제재공급팀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해진다. 기온이 떨어지면 시민들의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각급 학교의 방학으로 단체 헌혈이 급감하면서 혈액 보유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동절기 혈액 보릿고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으며, 대체할 물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건강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혈만이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울철은 헌혈자에게도, 수혈을 기다리는 환자에게도 가장 가혹한 계절이다.
혈액원 제재공급팀장으로서 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그날의 혈액 보유 현황판이다. 적정 혈액 보유량인 5일분이 넉넉하게 채워져 있을 때의 안도감은 잠시뿐, 겨울철에는 ‘주의’단계인 3일분 미만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아진다. 숫자로 표시되는 그 데이터 뒤에는 당장 수술을 받지 못해 애태우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절박한 눈물이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겨울철 혈액 부족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앞서 언급한 방학이라는 계절적 요인 외에도 독감과 같은 호흡기 질환의 유행은 헌혈 적격자를 감소시킨다. 게다가 최근 가속화되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혈액 수급의 구조적인 어려움을 심화시키고 있다. 헌혈 가능 인구인 청년층은 줄어드는 반면, 수혈이 주로 필요한 고령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부족 현상을 넘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장기적인 과제임을 시사한다.
현장에서 병원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지금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혈액이 부족합니다.” 응급환자, 백혈병 환자, 출산 중 과다출혈 산모 등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혈액을 제때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실무자로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다. 부산 지역 내 수많은 병원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가 누군가의 따뜻한 나눔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공급하는 붉은 혈액 팩 하나하나가 곧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줄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위기 때마다 빛나는 시민의식을 발휘해 온 저력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감염의 공포 속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헌혈의 집을 찾아주셨던 부산 시민들의 행렬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 뜨거운 연대와 나눔의 정신이 이 유난히 추운 겨울, 다시 한번 발휘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가장 고귀한 생명 나눔의 실천이다. 헌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0~30분 남짓이다. 잠깐의 따끔함이 지나면, 나의 혈액이 누군가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벅찬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헌혈 과정에서 진행되는 기본적인 혈액 검사를 통해 자신의 건강을 확인해 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의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시민 여러분, 그리고 부산 지역의 기업 및 단체 관계자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드린다. 이번 겨울, 가까운 ‘헌혈의 집’이나 ‘헌혈 버스’를 찾아 팔을 걷어붙여 주시길 바란다. 특히 방학을 맞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허리인 중장년층의 적극적인 헌혈 참여가 절실하다. 직장 동료와 함께, 혹은 가족의 손을 잡고 헌혈에 동참하는 모습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교과서보다 훌륭한 생명 존중의 교육이 될 것이다.
연말연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며 마음을 전한다. 올겨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 ‘생명’을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러분이 나누어 준 혈액은 차가운 수술실을 덥히고, 병상의 환자에게 다시 봄을 꿈꾸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부산의 겨울 바람이 아무리 차갑다 해도, 우리가 나누는 생명의 온기보다는 강할 수 없다. 여러분의 따뜻한 헌혈 참여가 꽁꽁 얼어붙은 혈액 수급의 위기를 녹이고, 더불어 사는 우리 부산을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 당신의 팔을 걷어 생명을 잇는 기적에 동참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