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50년 신진 , 숨겨둔 ‘혁명 본색’ 장시로 노래하다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출간
경구·잠언 담은 잠언시 경향
사회 향한 우려 목소리 담아
등단 50년을 맞는 신진 시인이 5년 만에 열한 번째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산지니)를 출간했다. 이 시집에는 공교롭게도 50편에서 1편 모자라는 49편의 시가 수록됐다. 시인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퇴직하고 나서도 평론가, 동화작가, 부산 아너소사이어티 클럽 회원, 그리고 농부로서 세상에 여전히 ‘신진(新進)’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이름에 ‘새벽의 명령이다. 나아가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시집은 의미심장한 ‘수평잡기’로 시작한다. ‘상류에서 싸대는 오물/하류에서 삭여야 한다//상류가 가뭄에 목이 마르면/하류는 쫄쫄 굶어야 하고//…그래도 강은 아는가 보다/하류가 떠내려가면/상류도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사실을//강은 위아래 높이를 맞추어가며 흐른다.’ 다들 비우라고 성화인데 시인은 ‘비우지 마라’고 거꾸로 말한다. 비우는 일이란 애당초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공연히 미혹과 허세를 쏟아놓다 남의 길막이나 될까 우려하기 때문이다. ‘기러기와 오리’에서는 기러기의 몸과 마음은 날갯짓하는 고역의 순간에 평안하기에, 날지 않는 동안 기러기는 똥밭에서 뒤뚱거리는 오리라고 일갈한다. 경구(警句)나 잠언 같은 느낌이 물씬해서, 잠언시로 읽어도 좋겠다.
이번 시집의 특징은 우리 사회를 향한 시인의 목소리가 많이 담겼다는 것이다. 표제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도 그렇다. ‘걷지 못하고 나앉아 있는 슬픔을 지날 때에는/걷는 슬픔이여 너도 잠시 멈추었다 가라/너도 슬픔이고/못 걷는 슬픔이었지 않느냐?’ 시인은 이 시에서 “언제 비 오지 않는 날 있더냐”며 “서로 얼굴 살핀 후에 제가끔 길을 나서듯/잠시 등짝 다독이며 얼굴 살피다 가라”고 따뜻한 손길을 내민다.
‘시 쓰지 마라’도 흥미롭다. ‘시 쓰려거든/시 쓰지 마라//시는 이미/사방에 널려 있다//시를 쓰노라면/시를 날리고 마느니//시를 쓰겠다면 시를 버려야 하고/시를 만나자면 시를 잊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지우고 잊고 잃은 시는/눈비 맞고 눈총 맞으며/드디어는/흘러가는/한 줄 문장으로/천지간에 빨래줄 모양 널릴 것이니’가 진심일 것이다. ‘개 같은 시’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힌다.
이번 시집의 절정은 12개의 시로 구성된 장시(長詩) ‘혁명본색’이다. 장시는 할 말이 많을 때 쓴다. 111~137페이지에 실린 이 장시는 현실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참여시로 읽힌다. ‘건달 세상’에는 법치의 팔자걸음, ‘웃기네’에는 주먹 없는 건달들이 주먹으로 주름잡는 웃기는 세상에 대한 비판이 실렸다. ‘그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좌절도 하지만 ‘그래도 가네’라는 시로 꿋꿋하게 마무리한다.
신 시인은 “혁명은 이뤄질 수 없지만 포기할 수도 없다. 철저히 알고, 희망이라도 잃지 말자는 간절함으로 장시 혁명본색을 썼다. 2021년 무크지에 발표한 시에다 새로 쓴 시 6편을 추가했는데, 시집을 낸 시점이 참 시의적절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