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은의 문화 캔버스] 술과 그림에 취한 신선, 장승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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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

고종이 러시아 황제 대관식 때 선물
희귀한 고사인물도 4점 일반에 공개
조선 3대 화가 천재성 다시 볼 기회

오원 장승업의 희귀한 고사인물도 4점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노자출관도' '취태백도' '왕희지관아도' '고사세동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오원 장승업의 희귀한 고사인물도 4점을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왼쪽부터 '노자출관도' '취태백도' '왕희지관아도' '고사세동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제공

조선 후기 화가 오원 장승업(1843~1897)의 작품 가운데 그간 러시아에 보관된 까닭에 국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고사인물도’ 4점이 일반에 공개되어 눈길을 끈다. 조러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을 기념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조선과 러시아, 140년 전 맺어진 우정’이라는 제목의 전시가 그 주인공이다. 이 전시는 애초에 8월 말에 끝나는 것으로 예정되었지만 전시 기간이 11월 30일까지로 연장된 덕분에 필자도 작품을 직접 관람할 수 있었다.

이 작품들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다음 해인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이 같은 해 러시아 황제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보냈던 선물의 일부다. 고사인물도는 후세에 귀감과 본보기가 될 만한 중국 역사 속 인물과 일화를 그린 것으로 ‘노자출관도(老子出關圖)’ ‘취태백도(醉太白圖)’ ‘왕희지관아도(王羲之觀鵝圖)’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4점이다. 앞의 두 작품은 작년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박물관에서 127년 만에 처음 공개되었고, 뒤의 두 작품은 이번 전시에서 128년 만에 첫선을 보였다. 원본이 아닌 영인본 전시이기는 하지만 원본과 거의 다름없는 고해상도에 높이 174cm 크기의 대작이어서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노자출관도’는 소를 타고 오는 노자에게 국경 검문소 관리 윤희가 지혜의 말을 청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때 노자가 쓴 것이 〈도덕경〉이라 전해진다. ‘취태백도’는 술을 마시고 나서야 시를 썼다는 당나라 시인 이태백을 묘사한 그림이다. ‘왕희지관아도’는 서예가 왕희지가 유연하게 변하는 거위의 긴 목에서 서체의 영감을 얻었다는 고사를 담고 있으며, ‘고사세동도’는 오동나무를 사랑했던 화가 예찬이 친구가 나무에 무심코 뱉은 침을 씻어 내게 했다는 일화를 통해 자연에 대한 사랑과 청렴하고 고결한 정신을 상징한다.

장승업 작품 관람과 함께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취화선’(2002)을 보는 것도 추천한다. 영화는 기인 장승업의 어린 시절부터 구한말 격동기를 거쳐 화가로 대성했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기까지 생애 전 과정을 다룬다. 한 폭의 동양화를 보듯 뛰어난 영상미를 감상할 수 있다. ‘술과 그림에 취한 신선’이란 의미의 영화 제목 ‘취화선(醉畵仙)’은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던 장승업의 생애와 그의 성격을 잘 담고 있다. 그는 돈·명예·권력 같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그에게는 오로지 그림과 예술적 영감을 북돋아 주는 술뿐이었다. 영화가 묘사하고 있듯이, 그는 그림의 대가로 받은 돈도 술 마시는 데 모두 탕진했고, 가정도 제대로 꾸릴 수 없었으며, 평생 그림을 원하는 후원자들의 사랑방이나 술집을 떠도는 방랑자로 살았다. 고종이 그에게 벼슬을 내려 궁중에서 작업하게 했지만, 그마저도 그는 구속이라 여기고 자유를 찾아 궁에서 탈출했다.

장승업은 조선 초기 안견, 조선 후기 김홍도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화가로 손꼽힌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장승업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산수화·인물화·화조화·동물화·기명절지화 등 다양한 장르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이루었는데 전통 화법과 외래 화법을 종합·절충해 자신만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가 뛰어난 기량으로 당대의 화단에서 이름을 떨치자 고관대작과 일본인들까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애호가층이 폭넓게 형성되었다. 당시 화단에서는 호방하고도 과감한 생략을 특징으로 하는 필묵법의 인물화와 화조화·영모화가 유행했는데, 이것은 장승업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의 산수화는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산수화풍의 근원이 되었고, 유려한 필치로 그린 도교의 신선이나 불교의 인물 그림도 근현대 회화로 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까지도 글씨와 그림은 그 근원이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만 권의 책을 읽은 기운이 우러나야 한다는 의미의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를 주장한 추사 김정희 등의 조선 문인화 전통이 지배적이었다. 문인화 전통은 대상에서 느껴지는 내면세계와 정신적 의미를 그려내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도 시대적 변화와 함께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장승업의 그림이 큰 인기를 얻은 이유는 변화하던 시대가 요구하던 그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림 수요자도 왕실·양반층에서 상인·평민들로 확대되었고, 근대 화풍이 도입되면서 팔기 좋은 형식 위주의 감각적 그림이 요구되기 시작했다. 직업 화가였던 그는 이러한 요구에 들어맞는 기운생동의 화풍을 선보였다. 그래서 장승업은 불우한 천재라기보다는 지식인 화가 시대가 가고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화가 시대를 선도한 화가로 평가해야 할 것 같다.

성큼 다가온 낙엽의 계절, 오원 장승업의 작품과 영화를 만나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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