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리부팅시켜 준 바닷가 맨발걷기…2막 향해 다시 ‘큐~’ [맨발에 산다] ②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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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안리의 맨발 여인 남승혜 씨]

부산 가톨릭평화방송 프로듀서 활동
코로나 후유증으로 뇌경색 재발 고통

수술 대신 선택했던 광안리 맨발걷기
2주일 만에 효과…2년째 꾸준히 실천

지인 만날 때도 웬만하면 “맨발로 보자”
건강 되찾고 제2 인생 준비 '뚜벅뚜벅'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맨발 차림으로 만난 남승혜 씨. 남 씨는 2년째 이곳 광안리에서 맨발걷기를 하면서 재발한 뇌경색을 이겨 내고 제2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맨발 차림으로 만난 남승혜 씨. 남 씨는 2년째 이곳 광안리에서 맨발걷기를 하면서 재발한 뇌경색을 이겨 내고 제2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

2022년 5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기 위해 사직야구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이었다. 속이 메스꺼워지더니 스멀스멀 구토까지 밀려왔다. ‘괜찮겠지, 금방 좋아지겠지’하고 참고 견뎌 봤지만, 증세는 야구를 보고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7년 전 진단받은 뇌경색이 재발한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겪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던 당시의 절망감. 건물 외벽에 붙은 한글 간판을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느꼈던 그 당혹감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이 들고 덩치만 커졌다 뿐이지 한글조차 읽지 못하는, 영락없는 바보였어요.” 한여름 무더위가 긴 꼬리를 드리우던 9월 초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만난 남승혜(50) 씨. 2년 전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하다 스스로 어이없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일 이후로 2년 넘게 매일 같이 광안리에서 맨발걷기를 한다는 승혜 씨의 ‘맨발 생환기’를 들어 봤다.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남승혜 씨. 남 씨는 광안리 맨발걷기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김희돈 기자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맨발걷기를 하고 있는 남승혜 씨. 남 씨는 광안리 맨발걷기를 통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김희돈 기자

다시 2022년이다.

승혜 씨는 그해 3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앞서 2015년 뇌경색 진단을 받았던 승혜 씨는 부작용 우려로 코로나 예방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확진이 되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뇌경색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코로나 후유증이었다. 곧장 처음 뇌경색 진단을 받았던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향했고, 뇌경색 재발이라는 진단과 함께 수술을 권유받았다.

“바닷가에서 맨발걷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평소 다니던 부산의 한 한의원 원장의 제안이었다. 평소 승혜 씨의 건강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한의원 원장은 ‘바닷가를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이 잘 된다’며 적극 권했다. 원장의 맨발걷기 제안은 수술을 망설이던 승혜 씨의 귀에 콕 박혔다. 마침 집이 광안리해수욕장까지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걷기 시작했다. 수술을 제안한 서울 병원에선 약 처방을 받고 퇴원했다. 수술은 6개월 후 경과를 보고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방송 리포터와 아나운서, 피디로 광안리해수욕장의 변천사를 지켜본 남승혜 씨가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남 씨에게 광안리는 새 삶을 선사한 고마운 곳으로 기억된다. 김희돈 기자 방송 리포터와 아나운서, 피디로 광안리해수욕장의 변천사를 지켜본 남승혜 씨가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맨발걷기를 하고 있다. 남 씨에게 광안리는 새 삶을 선사한 고마운 곳으로 기억된다. 김희돈 기자

바닷가 맨발걷기 효과는 생각보다 빠르고 확실했다. 광안리 해변을 걸은 지 2주일 정도 되자 몸이 반응을 보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느라 온종일 지쳐 지내던 일상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피로감 탓에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눈을 붙여야 했었는데, 어느새 ‘옛일’이 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틈날 때마다 광안리 해변을 누비느라 평소보다 몸을 더 움직였는데도 피곤함은 오히려 덜했다. 수시로 괴롭히던 감기도 멀리 달아났다. 가끔 찾아오더라도 예전처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

태풍이 몰아치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를 제외하고 매일 걷고 또 걸었다. 6개월 후 다시 찾은 서울 병원에선 더 이상 수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혜 씨를 기쁘게 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덩치 큰 바보’가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두 눈으로 글자를 보고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또 무슨 뜻인지 몰라 절망했던 자신이 더 이상 아니었다.

광안리의 맨발 여인 남승혜 씨가 딸 오도경 양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승혜 제공 광안리의 맨발 여인 남승혜 씨가 딸 오도경 양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승혜 제공

예상치 못했던 맨발걷기 효과는 삶의 방식도 바꿨다. 뇌경색이 재발할 무렵, 승혜 씨는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남편이 출퇴근할 수 있는 수도권으로 이사할 참이었다. 실제로 집을 구했고 계약까지 앞두고 있었지만 포기했다. 승혜 씨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광안리 맨발걷기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승혜 씨 가족은 결국 주말에만 함께할 수 있는 ‘이산가족’이 됐지만 아쉬움보다 감사함을 더 느꼈다고 한다.

‘맨발걷기의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이상 입 꾹 다물고 혼자 즐길 성격이 아니었던 승혜 씨는 맨발걷기 전도사로 나섰다. 대상은 양가 부모님 등 집안 어른은 물론이고 친구나 지인, 심지어 다른 학부모까지 제한이 없다. 광안리는 예배당이고, 맨발걷기는 찬송가인 셈이다.

승혜 씨는 대학교 때 학교 방송국 활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부산 KBS 리포터와 가톨릭평화방송 아나운서·피디 등 방송인으로서 20~30대를 보냈다. 마흔을 앞두고 덜컥 방송국을 그만두고 아이들 교육·놀이 시설을 열어 운영하는 모험도 했다. 사업을 접은 뒤엔 두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틈틈이 다녀온 가족 여행에 행복을 느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만난 질병과 이를 이겨내고 있는 승혜 씨에게 맨발걷기는 어떤 의미일까?

남승혜(왼쪽) 씨가 지난 6월 부산대 평생교육원에서 디지털소통지도사 2급 자격증을 받고 있다. 맨발걷기를 통해 새 삶을 얻은 남승혜 씨는 요즘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남승혜 제공 남승혜(왼쪽) 씨가 지난 6월 부산대 평생교육원에서 디지털소통지도사 2급 자격증을 받고 있다. 맨발걷기를 통해 새 삶을 얻은 남승혜 씨는 요즘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남승혜 제공

“처음엔 병이 재발한 걸 알고 절망했지만, 광안리 맨발걷기를 하면서 제 삶은 또 리부팅된 거죠. 그래서 요즘은 인생 2막을 위한 '큐 사인' 준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승혜 씨에게 두 번째 삶을 살게 해 준 맨발걷기는 '새 엔진'인 셈이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다시 뛸 수 있는 동력이 된 엔진. 리부팅된 엔진은 2년 동안 쉼 없이 가동됐다. 디지털소통지도사, 스피치 강사, 퍼스널 컬러 전문가, 라이브 커머스 전문가…. 승혜 씨가 자격증을 따거나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다. 해외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관심이 많다는 승혜 씨는 한국어 지도사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광안리 바닷가 맨발걷기가 달아 준 승혜 씨의 날개가 어디까지 비상할지 궁금하다.


김희돈 기자 happy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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