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음모론이 가장 쉬웠어요
이대진 TV방송국 총괄부장
‘부정선거 끝장토론’ 허무한 결말
허위 판명엔 수많은 팩트체킹 필요
음모론은 공론화 대신 무대응으로
확증 편향, 정신적 고립에 초점을
사하구 장림동으로 기억한다. 제보 전화를 받고 달려갔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진지했다. “국정원으로부터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집안 곳곳에 도청 장치가 있어요.” 지금이라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테지만 사회부 막내 기자 시절엔 지나칠 수 없었다. 좁다란 골목길을 헤맨 끝에 제보자 주소지에 도착했다. 그러고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걸 직감했다. 잔뜩 어지럽혀진 집안 어둠 속에서, 덥수룩한 머리와 때 묻은 운동복 차림의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안쪽 방으로 잡아끌더니 벽지와 천장에 묻은 검은 점을 가리키며 감시 카메라라고 설명했다. TV도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며, 24시간 감시당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충분히 이야기를 들어드린 뒤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는 따라 나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배웅했다.
옛날 기억을 장황하게 떠올린 건, 부정선거 음모론에 빠진 이들이 겹쳐 보여서다. 지난달 27일 한 유튜브 방송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인가’를 주제로 끝장토론이 진행됐다. 18일 저녁 기준 해당 동영상은 무려 624만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댓글도 4만여 개가 달렸다. 중복 클릭을 감안하더라도 어림잡아 대한민국 성인 10명 중 1~2명은 시청한 것으로 추산된다. 안 보신 분들에게는 권하지 않겠다. 날짜를 넘겨 7시간 넘게 이어진 토론을 끝까지 보고 나서 허무함과 후회가 밀려왔다.
양측 주장은 내내 평행선을 달렸다. 전한길 대표(전한길뉴스)와 이영돈 PD, 박주현 변호사, 김미영 대표(VON뉴스)가 의심스러운 물증을 제시하면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부정선거가 아니라 부실 관리 사례라며 맞받았다. 뒤로 갈수록 이 대표가 힘겨워 보였다. 홀로 4명을 상대한 탓도 있지만, 경찰 수사가 아닌 토론회에서 사실관계를 명명백백 가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참여한 ‘맨해튼 프로젝트급’ 운운하며 대법원 판결마저 선거 조작의 일부라 여기는 이들 앞에서, 이 대표는 토론 결과를 예상 못 했을까.
음모론의 힘은 그럴듯함에서 나온다. 이는 확증 편향과 강하게 연결된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공통된 편향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 당선돼야 마땅하다는 확신이다. 빨간 안경으로 보면 온통 ‘빨간당’ 세상인데, ‘파란당’의 승리를 납득할 리 만무하다. 상대 진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9년 전에는 영화 ‘더 플랜’을 만든 김어준과 그 지지 세력이 그랬다.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고 결론 내리는 순간, 수많은 정황이 부정선거의 증거로 보인다.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197세 유권자, 배춧잎·일장기 투표지, 화웨이 와이파이, 회송용 봉투 배송경로 오류 등 선관위의 관리 부실과 실수가 거대한 세력의 선거 조작으로 귀결된다.
음모론을 만들기는 쉽지만, 깨부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허위 여부를 밝히려면 지난한 팩트체킹을 거쳐야 한다. AI 프로그램으로 단 몇 초 만에 ‘전쟁 영상’을 만들 수 있지만, 허위 판독에는 몇 배 몇십 배의 시간과 품이 들어간다. 거짓으로 판명돼도 외려 가짜뉴스라며 외면하는 이들도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끝장토론 이후 제기된 36가지 의혹을 정리해 20쪽 분량의 해명자료를 냈다. 이도 모자라 주요 쟁점만 따로 떼어내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럼에도 음모론은 끄떡없다. 한국판 맨해튼 프로젝트의 당사자가 내놓은 자료를 누가 믿겠는가.
음모론의 초기 대처법은 간단하다. 무관심과 무대응이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에 굳이 대응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부정선거 주장을 공론장으로 끌어낸 이준석 대표는 음모론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17년 전 장림동 제보자의 이야기를 기사로 다룬 셈이다. 조명해야 할 건 제보자 주장이 아니라,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정신적·사회적 고립이다. 벽지를 새로 바른다고, TV를 신형으로 바꾼다고 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장림동 아저씨가 현관 밖으로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끔 도왔어야 했다.
뒤늦은 반성과 함께, 골방에 틀어박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결과적으로 파란당을 키워준다는 점에서 전한길 대표는 빨간당에 해로운 세력이다. 그의 주장과 행동이 황당할수록 민주당에는 호재다. 혹시 맨해튼 프로젝트급 비밀 세력으로부터 ‘X맨 활동’ 지령을 받은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처음엔 계엄을 비판하다 정반대로 돌아섰다. 생각하면 할수록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연 수십억 원씩 벌던 일타강사가 본업을 내팽개치다니. 분명 지령과 함께 거액의 활동비도 받았을 것이다. 어떤가. 그럴듯하지 않나. 음모론 만들기가 이렇게 쉽다. 거짓이라면 어디 한번 증명해 보라.
djrhee@busan.com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