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 칼럼] 부산 오페라의 '가치 제안'
수석논설위원
엑스포 유치 사우디, 오페라극장 추진
3000억 들여 뉴욕 오페라 상주 시도
'라 스칼라 105억' 논란 부산과 유사
세계 정상급 극단, 향수 의존 안 해
필요한 예술 입증 관객·후원자 확보
부산도 공론화 거쳐 가치 인정받길
부산이 2030세계엑스포를 유치했다면 행사장인 북항 재개발지는 천지개벽 중일 것이다. 핵심부에 위치한 오페라하우스(2000석)는 기념비적인 개관 공연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각인시킨 뒤 정상급 무대 도약을 향해 순항할 것이다. 아쉽게도 엑스포 유치전에서 떨어진 탓에 북항 재개발과 오페라극장을 묶은 해양문화도시 전략은 정체기를 맞고 있다.
부산을 누르고 개최지로 선정된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보는 부산과 닮은 점이 많다. 박람회장에서 약 15㎞ 떨어진 디리야에는 2029년 완공을 목표로 왕립 오페라극장(2000석)이 추진되고 있다. 사우디 왕조의 발상지인 이곳을 역사와 관광, 공연예술이 어우러진 문화 메카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부산과 디리야는 모두 노르웨이 건축사무소 스뇌헤타가 설계했다. 스뇌헤타는 오슬로 오페라극장의 지붕을 바다에서 육지로 이어지는 경사 구조로 설계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걸어 오를 수 있는 광장으로 바꿔 놓았다. 항만 재개발과 도시 브랜드 혁신의 상징이 된 오슬로 모델 이후 싱가포르와 부산 같은 해양 도시들은 오페라극장을 앞세운 워터프런트 개발에 나섰다.
부산과 디리야는 개관을 전후해 세계 정상급 극단을 초청하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부산은 105억 원을 들여 이탈리아 라 스칼라의 사흘간 공연을 추진 중이다. 사우디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를 통째로 이식하려 한다. 지난해 9월 체결된 MOU에 따르면 메트 단원들은 매년 동계 3주간 사우디에 머물면서 ‘겨울 상주 극단’으로서 무대에 오른다. 또 성악과 연출, 무대 디자인, 기술도 교육한다. 사실상 뉴욕 오페라의 복제다.
계획대로라면 엑스포 개최 기간(10~3월) 메트는 사우디에서 정규 공연 중이고 관람객들의 발길도 자연스럽게 공연장으로 향할 것이다. 그 대가로 사우디가 제시한 금액은 5년 동안 2억 달러(우리 돈 3000억 원). 코로나19 이후 재정 악화에 시달리던 뉴욕 메트에게 구세주 같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중동 정세 악화가 사우디 자금난을 초래하면서 4월 말 협상이 결렬됐다.
뉴욕 메트 없는 사우디 오페라의 안착, ‘오일 머니’ 없는 경영난 해소 대책의 향배에 전 세계 오페라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오페라극장이 안고 있는 공통 고민이기 때문이다. 후원·관객·티켓 수입 감소로 인한 운영난 속에 제작극장의 품격을 유지하면서도 지속 가능한 재원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관객과 수입 기반을 넓히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때 뉴욕 메트가 유료 회원제 VOD를 선보인 게 대표적인 사례다. 영국국립오페라단(ENO)은 3D VR(가상현실) 앱으로 진일보했다. 평면 화면이 아닌 공간 자체를 디지털화해서 관객이 공연 중인 성악가 옆이나 무대 안쪽으로 시점을 옮겨 가며 관람할 수 있게 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페라가 지난해 11월 중국 고전 ‘서유기’를 바탕으로 창작 오페라 ‘더 몽키 킹’을 초연한 것도 참신한 도전으로 꼽힌다. 동양 서사를 가져오고, 게임 캐릭터 손오공의 팬덤 문화를 결합한 점이 주목받았다. 특히 엔비디아 창업자 젠슨 황을 후원자로 끌어들여 매년 500만 달러(우리 돈 75억 원)씩 기부 약정한 것은 새로운 후원 모델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다.
과거 오페라 공연의 수준은 성악가와 지휘자, 오케스트라의 기량과 해석에 좌우됐다. 최근에는 각색과 시각적 효과가 강화되는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 악보를 충실히 구현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스토리의 재구성과 관객의 경험을 중시하는 연출이 극장의 차별화와 관객 유치에 기여한다. 이 고민을 마케팅 용어에 빗대면 ‘가치 제안’(Value Proposition)이다. 과거의 향수에 기대며 “오페라를 살려 달라”고 해서는 안 되고, 관객과 후원자가 가치를 인정하고 지갑을 열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ENO 전 예술감독 존 베리는 5월 17일 자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흥행 수입을 넘어서는 사회·문화적 가치를 입증할 때 비로소 ‘필요한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면서 ‘가치 제안’을 강조했다. 예컨대 무대 형식을 혁신하고, 디지털 등 관객 유입 경로를 다양화하며, 공연이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우디의 3000억 원짜리 문화 이식 프로젝트는 민주적 의사 수렴 과정이 생략되는 왕정이니 가능했다. 부산은 105억 원짜리 라 스칼라 공연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최대 4000억 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오페라극장 개관을 앞둔 시점이니 어쩌면 적절한 공론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부산시 당국이 해야 할 일은 105억 원 그 이상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과해서 부산이 라 스칼라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세계적인 제작극장으로의 도약 여부는 부산 오페라의 ‘가치 제안’에 달려 있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