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 칼럼] 돌아온 로맨스
수석논설위원
올 1월 결혼·출생 통계 상승세 지속
합계출산율 0.7명대서 0.99명 ‘껑충’
최근 멜로물 흥행, 현실 연관성 주목
'3포' 여전 '구조적 반전' 낙관 금물
코로나 연기 결혼 늘어난 효과 주목
일시 반등 넘어야 지속 가능한 사회
‘데이트는 죽었다.’ 미국 〈뉴욕타임스〉 2013년 1월 11일 자 기사 ‘구애의 종말?’(The End of Courtship?)의 진단이다. 전통적인 연애 방식이 사라지면서 진지한 관계 발전의 기대감이나 상호 구속력이 없는 ‘훅업’(hookup)과 ‘행아웃’(hangout)이 데이트 문화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관계가 목적이거나 썸만 타다 마는 식의 속성 관계다.
〈뉴욕타임스〉가 지적한 로맨스의 위기는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직결된 현상이다.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로 시작해 ‘n포’로 악화한 한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 취업·주거난과 독박 육아 앞에 달콤하거나 가슴 시린 사랑의 감정은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다. 2030 세대의 이른바 ‘갓생’(God·生) 심리에 비춰 보면 연애는 점점 ‘비효율적인 선택’으로 밀려난다. 감정 낭비를 줄이려는 ‘갓생’의 논리에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현실 로맨스와의 괴리감이 커지니 극 중의 대리 체험에 몰입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다. 사랑을 감정 노동쯤으로 치부하는 세태에 순애보를 다루는 드라마와 영화는 눈길을 끌기 어렵다. 어느새 범죄와 권력 암투, 사적 복수, 재난 소재가 K콘텐츠의 주류가 됐다.
하지만 최근 멜로 장르가 이례적인 흥행 행진을 하면서 업계와 평단은 원인 분석에 분주하다. 올 초 가난한 청춘의 사랑을 그린 영화 ‘만약에 우리’가 대작 외화 ‘아바타’를 밀어내고 롱런했고,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되나요?’는 글로벌 무대를 달구면서 K로맨스의 가능성까지 과시했다. 가상 연애 시뮬레이션을 다룬 ‘월간남친’, 이성 교제에 서툰 30대의 심리를 다룬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그리고 고교 첫사랑을 긴 호흡으로 그려내는 정통 로맨스 ‘샤이닝’까지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풍년이다. 갑작스러운 로맨스의 소환을 스릴러, 판타지 등 자극적인 장르에 지치며 순수함을 찾게 되는 역설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로운 관계 맺기조차 효율과 비용으로 계산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투영된 서사라는 행간 분석도 있다. 여기서 빠져서는 안 되는 질문이 있다. 로맨스의 귀환은 낭만의 회복인가, 아니면 일시적 유행인가.
‘결혼 건수 8년 만에 최대치.’ ‘출생아 수, 19개월 연속 증가세.’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 0.99명.’
국가데이터처가 25일 발표한 올 1월 인구 통계를 전하는 뉴스는 환호와 감격 일색이다. 혼인 증가에 세계 최저 출산율 그래프까지 고개를 든 것이 반가운 변화다. 현상 유지 기준인 합계출산율 2.1명에 턱없이 못 미치지만 0.7대에서 0.99로 껑충 뛴 것은 추세 반전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극 중 로맨스의 부활과 현실 트렌드 변화에 상관성이 있는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결혼이 늘고 출산이 뒤따르는 선순환이 복원되는 것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걸린 문제다. 지난 20년간 청년 세대와 신혼부부 지원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저출생 현상을 ‘문명적 위기’로 규정했던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한국인 3분의 2가 사라질 것… 북한군은 (침공을 위해) 그냥 걸어 내려오면 된다”는 말은 실언으로 끝나야 한다. 다만 통계 변화가 일시적 신호인지, 구조적 전환의 시작인지 따지는 것은 필수다. 통계의 착시 효과로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국은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2022~2023년 혼인과 출산에서 ‘바닥’을 찍었다. 2022년 19만 1690쌍 결혼이 역대 최저치였는데 이듬해 1%, 2024년 14.8%, 2025년 8.1% 증가했다. 선행 지표인 결혼 증가에 출생도 시차를 두고 상승 반전했다. 2023년 23만 28명까지 추락했다가 2024년 3.6%, 2025년 6.8% 신장했다. 올 1월 합계출산율 1명 턱걸이의 낭보는 이런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흐름이 비대면 시대가 끝나면서 미룬 결혼식이 몰린 이연 효과에 그친다면 곤란하다. 전무후무한 ‘바닥’을 딛고 올랐기 때문에 상승 폭이 커 보이는 기저 효과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일본의 속절없는 하락세는 반면교사다. 합계출산율은 2021년 1.3명을 기록한 이후 지난해까지 줄곧 떨어져 1.15를 밑도는 수준까지 밀렸다. 한국과 달리 혼인이 출생을 견인하지도 않고 코로나 변수와도 무관하게 전 지표가 동반 하락하는 고착 국면이다.
소멸로 가는 급행열차의 속도가 잠시 늦춰졌다고 해서 안심하고 낙관하면 금물이다. 이연·기저 효과로 인한 ‘깜짝 반등’에 그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일본처럼 추세 반전의 모멘텀을 찾지 못해 대세 하락으로 복귀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일시적 반등이 아닌 구조적 전환이 우리 사회에 남겨진 과제다. 근본 해결책은 연애·결혼·출산 포기가 합리적 선택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며, 이는 로맨스 흥행이 지속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