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만 명 넘게 당한 '밑장빼기'[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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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짜>의 한 장면. 도박꾼 아귀가 밑장빼기를 의심하고 주인공 고니의 손을 잡고 위협하는 모습이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도박꾼 아귀가 밑장빼기를 의심하고 주인공 고니의 손을 잡고 위협하는 모습이다.

“동작 금지! 밑장빼기여?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영화 <타짜>에서 전설적 도박꾼 아귀가 내뱉은 말이다. 화투 밑장의 좋은 패를 몰래 빼내 자기에게 야금야금 돌림으로써 전체 판을 뒤집어엎는 데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부분에서 나온 대사다. 우리는 이 같은 밑장빼기가 도박판에만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밑장빼기 시도 같은 일은 줄곧 있었고 결국 순진한 참가자는 눈 뜨고 당하는 신세가 되곤 했다. 만약 그 밑장빼기가 개인적 일탈이 아니라 대규모 조직에 의해 이뤄진다면 어떨까. 그 같은 밑장빼기 수법에 당한 이들만 수백만이라면 더더욱…. 아귀의 대사를 읊조리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다.


2005년 이전까지 부산에 있었던 한국선물거래소는 매년 1월 별도로 선물시장 개장식을 열었다. 부산일보DB 2005년 이전까지 부산에 있었던 한국선물거래소는 매년 1월 별도로 선물시장 개장식을 열었다. 부산일보DB

■첫 번째 밑장

2005년 이전 부산지역에는 선물회사 본사와 지점 등 선물 관련 업체가 10여곳 가량 활발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선물거래소가 부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물거래는 당연히 부산의 선물거래소를 중심으로 이뤄졌기에 선물회사들의 부산 상주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2005년 증권과 선물을 통합한 한국거래소가 부산에 본사를 두고 출범한 뒤 상황이 돌변했다. 부산에서 선물회사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여기엔 한국거래소의 정교한 ‘밑장빼기’ 작업이 있었다.

한국거래소는 증권과 선물 통합 출범 이후 본사를 부산에 두면서도 차세대 전산시스템 구축이라는 명목으로 전산시스템을 모조리 서울로 옮겨버렸다. 서울과 부산의 지리적 거리는 전산 측면에서 봤을 때 별다른 차이가 없으므로 증권사가 많이 있는 서울로 옮기는 게 맞다는 논리였다. 차이가 없다면 당연히 본사에 두는 것이 타당할 텐데도 이 같은 지적엔 귀를 닫았다. 전형적인 밑장빼기 수법이다.

전산시스템의 서울 이전 여파는 예상과는 달리 엄청났다. 1초도 되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극초단타 매매를 하기도 하는 증권사들은 거래 우위를 점하고자 조금이라도 전산시스템 가까운 곳으로 몰려가는 행태를 보였다. 부산에 있던 선물회사들이 자취를 감춘 것도 증권과 선물의 통합이라는 시대적 대세 뿐만이 아니라 전산시스템을 따라간 측면이 컸다. 그게 아니라면 통합거래소 본사가 부산에 있는데도 부산지역 선물회사의 씨가 마른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다. 부산에 파생상품시장본부를 두고 부산을 파생금융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깃발들을 흔들어대는 이면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이 제대로 된 금융 중심지가 되리라 믿었던 부산 시민만 순진했다고 해야 할까.


2023년 2월 22일 전라북도 금융도시 추진위원회가 출범한 가운데,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라북도 제공 2023년 2월 22일 전라북도 금융도시 추진위원회가 출범한 가운데, 참석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라북도 제공

두 번째 밑장

부산이 서울 여의도에 이어 제2의 금융 중심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는 사이 제3의 금융 중심지 조성이라는 새로운 밑장빼기가 시도됐다. 2010년대 후반부터 나온 제3의 금융 중심지 조성 시도는 전주·전북을 중심으로 논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전주 이전이 계기가 됐다.

금융 관련 핵심 인프라를 서울로 빼내감으로써 한국거래소 본사라는 껍데기만 남은 부산으로선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지만 이는 곧 문재인 정부 대선공약에까지 포함됐다. 2024년 총선 땐 여야 공히 이를 공통 공약으로까지 내걸기도 했다. 지역균형발전 측면을 고려하면 전략적 거점 조성이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부산 금융 중심지의 위상과 경쟁력을 돌아보면 인력과 기관의 분산으로 밑장을 빼가려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해 3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투자센터빌딩에서 열린 국내 최초 대체거래소(ATS) '넥스트레이드(NXT)' 개장식에서 주요 내빈들이 개장 기념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부산일보DB 지난해 3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투자센터빌딩에서 열린 국내 최초 대체거래소(ATS) '넥스트레이드(NXT)' 개장식에서 주요 내빈들이 개장 기념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부산일보DB

세 번째 밑장… 파투?

명목상으로나마 본사를 부산에 두고 있는 한국거래소의 위상 자체가 흔들릴 일들이 지난해부터 잇따라 발생했다. 부산으로서는 밑장을 빼는 것이 아니라 아예 '파투'를 내는 셈이나 마찬가지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먼저 빠진 밑장은 지난해 3월 출범한 국내 최초 대체거래소 넥스트레이드(NXT)다. 한국거래소의 독점 구조를 깨고 자본시장 인프라를 다변화하자는 ‘거룩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부산 시민들은 한국거래소의 거래 물량이 대거 빠지는 게 아니라 당연히 투자자 편의를 키우는 보완재 역할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출범 1년이 채 되지도 않은 현시점에 NXT의 시장점유율은 32%에 육박하고 있다. 일정 점유율을 넘으면 거래를 제한하는 안전장치를 달고서도 NXT의 시장 잠식은 거침이 없어진 것이다. 지난해 거래 대금만 1520조 원에 이를 지경이니 한국거래소의 위상이 흔들릴 판이 됐다.

다음으로 빠진 밑장은 한국거래소에서 코스닥만 별도 자회사로 분리하고자 하는 시도다. 코스피 중심 의사결정 구조에서 벗어나 혁신과 성장에 걸맞은 제도를 만듦으로써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게 논리다.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치던 2005년에 내세운 논리가 ‘시장 효율성 강화’였음을 돌이켜 보면 20여 년 사이 손바닥 뒤집듯 하는 모양새다. 한국거래소 본사 유치로 금융 중심지가 되는 줄 알았던 부산시민들로서는 눈 뜨고 코 베이는 형국이나 마찬가지다. 한국거래소 전산시스템의 서울 이전으로 황폐화한 부산은 코스닥마저 자회사로 분리해 서울로 이전할 경우 금융 중심지가 아니라 주변지로 전락할 신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밑장도 정도껏 빼야 들키지 않는다. 너무 많은 밑장을 빼다 보면 판 자체가 엎어지는 ‘파투’가 될 수밖에 없다. 부산의 선물거래소를 통합한 한국거래소를 만들고 그 본사 주소지만 부산으로 해 놓고는 그동안 너무 많은 밑장을 빼내갔다. 320만 부산시민이 20년이 넘도록 당하고 있는 이 교묘한 밑장빼기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부산 시민들로서는 영화 <타짜>에서처럼 아귀의 대사를 읊기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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