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 ‘휴민트’ 여성 관객들 혹평 이유는
지난 11일 개봉한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가 개봉 직후 일부 여성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휴민트’를 관람한 여성 관객들은 특정한 장면과 설정이 여성 혐오적이며, 여성이 수동적으로 묘사되어 크게 불쾌했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구시대적 연출이라는 비판이 공감을 얻고 있는데, 이에 대한 반박도 나오는 등 갑론을박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뉴)·외유내강 제공
※이 기사는 ‘휴민트’에 대한 스포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휴민트’는 조인성, 박정민, 신세경, 박해민 주연의 액션 첩보 느와르 영화입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민)은 러시아 마피아와 손잡고 탈북한 여성들을 인신매매합니다. 이런 범죄 정황을 파악한 국정원 블랙 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이 사건을 파헤치면서 치열한 3파전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조 과장의 휴민트(정보원)이자 박건의 옛 연인인 채선화(신세경)가 말려들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양상으로 흘러갑니다.
‘휴민트’에서 여성 관객들이 가장 크게 비판하는 부분은 일명 ‘유리관 신’입니다. 극 중 러시아 마피아는 탈북 여성 한 명 한 명을 방탄유리로 된 케이지에 가둡니다. 여성을 팔아넘길 때 높은 값을 받기 위해 억지로 화장을 시키고, 순백의 옷까지 입힌 채 말입니다. 게다가 여성마다 등급이 매겨져 있으니, 이렇게 구시대적이고 불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비판하는 데에는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속 메타포(상징)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추측할 필요가 있습니다. 류 감독은 단순히 자극적인 묘사를 위해 이러한 여성혐오적 장면을 연출했을까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충분한 능력을 갖춘 여성이 성차별 등의 이유로 고위직을 맡지 못하는 상황을 ‘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고 합니다. 영어권에선 유사한 용어로 ‘유리절벽’(glass cliff)에 더해 ‘유리상자’(glass box), ‘유리감옥’(glass cage)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유리상자와 유리감옥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장벽이라는 의미는 물론이고 여성을 향한 억압, 통제, 성적 대상화 등을 상징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휴민트’ 속 유리관에 갇힌 여성들의 모습은 현실 속 유리상자와 유리감옥에 갇힌 여성들의 모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화장을 강요하는 것은 젠더억압을, 새하얀 옷을 입고 등급이 매겨진 채 유리관에 전시되는 상황은 여성을 향한 성적 대상화와 객체화, 차별을 의미합니다. 아주 직접적이고 현실 비판적인 메타포입니다.
‘휴민트’에서 이 기괴한 광경을 보고 희열을 느끼는 관객은 없을 겁니다. 여성은 물론 남성 관객도 묘하게 불쾌한 감정을 느낍니다. 현실의 유리상자와 성차별을 직관적으로 묘사하니 매우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겁니다. 성차별 문제를 꼬집는 나름의 사회 비판 장치라고 해석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 포스터. (주)시네마서비스 제공
‘억지 쉴드’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여성주의를 외면하는 창작자가 아니었습니다. 전작인 ‘밀수’(2023)만 해도 여성 캐릭터 중심의 여성 서사가 극의 핵심이었습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2002)는 한국 영화사에서 드물게 여성들을 주연으로 내세운 펄프 누아르 장르였습니다.
잘 살펴보면 ‘휴민트’에서의 여성 캐릭터들도 ‘남탕’이라 비판 받아온 그간 한국 상업영화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주체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조 과장의 여성 동료인 임 대리(정유진)는 살인병기 박건과 일대일로 당당히 맞붙는 캐릭터입니다. 격투신에서 남성의 폭력에 괴로워하는 피해자성만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일 거면 빨리 죽이라”며 박건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을 보여줍니다.
영화 ‘휴민트’ 스틸컷. NEW(뉴)·외유내강 제공
주연인 채선화는 어떤가요. 채선화는 그저 남성들의 구조를 기다리기만 하는 공주님이 아닙니다. 순순히 갇혔다가 박건 왕자님에게 구조되지 않습니다. 그는 꾸밈을 강요받는 것부터 거세게 거부했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개선하려 합니다. 직접 권총을 들고 러시아 마피아를 상대하기도 하고, 유리관에 갇힌 여성 동지들을 풀어주기까지 합니다.
여성들의 연대도 잊지 않았습니다. 결말부에서 성치 못한 몸을 끌고 나타나난 임 대리는 위기에 빠진 남성 주연들의 구세주가 됩니다. 황치성의 총기 난사에 쓰러진 탈북 여성들을 자동차로 가로막아 보호하는 것도 여성인 임 대리이고, 직후에 여성들을 부축해 구하는 이들 역시 여성이었습니다. 적어도 위기에 빠진 여성을 백마 탄 기사가 구한다는 남성 중심적 구닥다리 설정을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장면들은 여성의 연대라는 요소를 녹여낸 대목입니다.
그렇다고 류 감독이 페미니즘을 핵심 메시지로 삼는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긴 합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는 여성 버디 영화이긴 했지만, 영화의 형식은 기존의 남성 주연 느와르물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밀수’에서도 여성들이 주인공이긴 했지만, 극의 흐름을 끌고 가는 핵심 캐릭터는 사실 남성이었습니다.
휴민트에서도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극의 핵심 캐릭터는 남성이었고 주요 서사도 남성 중심적이었습니다.
특히 전달 방식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여성들이 갇혀 있는 유리관이 엄폐물로 활용되는 액션신이 좀 과했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케이지 안에서 공포심에 떠는 여성들의 모습이 장시간 이어지는 시퀀스는 일부 여성 관객 입장에서 충분히 불쾌감을 느낄 만합니다.
주객전도라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습니다. 유리관에 갇힌 여성들이라는 설정 자체는 현실 비판적 장치였다고 해도, 액션신에서는 오락성과 신선함을 위한 도구로 소모되는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판을 감안하더라도, 류 감독이 ‘휴민트’ 때문에 다른 ‘남탕’ 영화 감독들과 동일시되는 건 억울해 보입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