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지역문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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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 ‘옛돌스트리트’
과거와 현재의 연결 통해 문화 향유

서울에서 온 한 떼의 ‘글쟁이’들을 데리고 대청로를 돌아 나올 때,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이 거리가 지니는 근현대사적인 의미를 잠시 설명한 적이 있다. 더러 놀란 눈으로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이도 있었으며, 멀뚱거리면서 자신에게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흘려듣는 이도 있었던 것 같다. ‘대청로’는 초량왜관 시절 지금의 부산 중구 대청동 광일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연향대청’을 본떠 만든 도로명이다. 그러니까 17세기 조선의 역사가 오롯이 지명으로 남아 비록 어두운 시대였을망정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의 바퀴가 남긴 흔적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이 마치 상징기호처럼 남은 것이다.

지난 10월 18일 민주공원에서 진행된 제1회 부마항쟁문학제 본행사를 복기한다. 그날 심포지엄 진행을 맡으면서 민주공원이 들어선 부산 중구의 상징성과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대청로와 광복로를 가득 메웠던 학생과 시민들의 외침을 잠깐 언급하였다. 멀리 광주에서 온 발제자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가려 부마항쟁의 의미가 과소평가된 면이 없지 않지만, 여러모로 살펴보더라도 부마항쟁이 지니는 중대한 가치와 의미를 찾고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국가 기념일을 비롯한 유산 지정이나 등재와 관련한 논의가 끊이지 않는 까닭은, 과거의 사건이나 행적을 포함한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뜻과 메시지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방향으로 삶의 윤택함과 문화적 향유를 누릴지 가리키는 일종의 ‘숨은 나침반’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 국가유산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여간 반갑지 않다. ‘우선등재목록’은 잠정목록 중 유산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보호·관리 계획 등을 충족하는 유산이며, 앞으로 문화유산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위한 공식 절차인 예비평가 대상으로 신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 선정된 피란수도 부산 유산에는 부산항 제1부두와 임시중앙청(부산임시수도정부청사) 등 기존의 9개 구성요소 외 영도다리와 복병산배수지를 새롭게 추가하여 등재 기준과 서술을 보완해 전체적인 완성도를 개선한 점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기까지 걸쳐 있는 이들 유산은 비단 스펙터클하면서도 부산했던 당시의 역사적 풍경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와 지향점, 그리고 자신이 속한 집단과 공동체가 이방(異邦)의 관계에서 빚게 되는 복잡하고 다양한 교류 과정에서 생겨나는 유·무형의 자산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의미도 중요한 작용을 한다.

정치나 경제처럼 사회를 지탱하고 유지·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중요하지만, 문화는 구성원들의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경제 논리를 넘어 사회를 오랫동안 풍요롭게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버팀목이자 인간 생태계의 병풍이다. 문화의 이런 기능이 구성원의 풍속뿐만 아니라 삶의 품격과 질을 높이는 바탕이 된다는 사실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그리고 문화가 인간에게 영향을 주면서 자아내는 무늬가 한 나라의 역사적 전통의 토대를 더욱 살찌우고 굳건하게 하는 문명의 요소라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날학파의 2세대를 대표하는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제시한 역사의 세 가지 층위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장기지속의 역사였다. 나머지는 사건사(事件史)와 중기지속 혹은 국면사다.

장기지속의 역사는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는 지리적 조건, 기후, 생태계, 그리고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양식을 말한다. 브로델에 따르면 이것이 역사의 가장 깊은 층위이며 인간 활동의 근본적인 제약과 가능성을 결정한다. 장기지속의 역사에서 어느 나라든 보편적인 요소로 영향을 주는 것이 문화다. 문화 역시 인간 활동의 기본 양식을 제어하고, 전망하고, 꽃피우는 삶의 결정적인 성분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이는 최근 이기대 예술공원 사업의 일부인 ‘옛돌스트리트’ 조성과 관련된 논란에도 일정한 해답을 준다.

‘이기대 예술공원’ 사업 중 하나인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 들어서는 옛돌스트리트는 옛돌문화재단이 일제강점기에 약탈당했거나 팔려나간 조선시대 석조 유물 등 65점을 부산시가 기증받으면서 이루어졌다. 어두운 미관과 이미지 때문에 인근 주민 일부의 반발로 잠시 중단된 상태로 있다. ‘지역 이기주의’의 발로는 아니겠지만 일부 주민의 비판을 겸허히 듣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지역문화의 융성을 위한 공원 조성에 부산시와 시민들이 절실한 마음과 뜻을 모아야 할 때다. 이런 실천이 피란수도 부산 유산의 우선등재목록 선정 및 민주주의 성지로서 부산과 함께 복합적이고 다채로운 지역문화 발전과 성장으로 우리에게 결국 선물로 되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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