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직지사에서 만나는 가을 배롱나무꽃
가을에 가장 유명한 꽃 중 하나는 상사화라고 불리는 꽃무릇이다. 전남 영광군 불갑사와 전북 고창군 선운사 그리고 경북 김천시 직지사가 꽃무릇 군락지로 유명한 곳이다.
5년 전 직지사 꽃무릇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숲 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는 꽃무릇은 그야말로 황홀하고 환상적이었다. 올해 다시 한 번 꽃무릇의 분위기에 빠져볼 작정으로 지난 10일 서둘러 달려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직지사 꽃무릇은 아직 피기 전이었다. 올해 만개가 조금 늦어지는 것인지 꽃대만 하나둘씩 올라올 뿐이었다. 활짝 핀 꽃은 딱 한 송이였다. 이 상태라면 이달 말쯤에나 화사한 선홍빛 꽃잔치가 펼쳐질 것 같다.
꽃무릇을 못 본 게 안타깝지만, 직지사는 백일홍 또는 자미화로 불리는 배롱나무꽃 ‘맛집’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직지사로 직진하기로 했다.
■직지사 배롱나무꽃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간다. 약 200m 정도 거리여서 힘들 정도는 아니다. 숲이 우거진 산책로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쉬엄쉬엄 걸어도 4~5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게다가 이곳에는 이미 가을이 찾아와 무더위는 찾아볼 수 없어 숲길 산책은 그야말로 ‘상쾌’ 그 자체다.
숲길 산책로가 일궈낸 풍경 하나하나를 눈에 담기 위해 천천히 걷는다. 절을 감싸 안은 황악산이 나그네 곁에서 나란히 동행이 돼 준다. 가족끼리 또는 연인끼리 산책하러 나온 사람들은 모두 느긋한 표정이다. 더위가 사라지고 세상은 온통 선선하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직지사는 418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방화 때문에 모든 건물이 소실됐지만 1602년부터 중창하기 시작해 60년 만에 완전히 복구됐다. 직지(直指)라는 이름은 ‘직지인심 변성성불’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 ‘누구나 가슴에 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교리를 공부하거나 마음을 다스리면서 수행하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직지사 경내에서는 가을 냄새가 진동한다. 단풍나무는 이미 곳곳에서 발갛게 물들어가고 있다. 다만 ‘김천 8경’ 중 하나라는 ‘직지사 단풍나무길’은 아직 물들지 않았다. 이곳도 이달 말 또는 내달 초는 돼야 발갛게 변할 모양이다. 단풍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나면’ 극락이 따로 없다는 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풍경을 즐길 수 없으니 다음 기회를 꼭 기다려야겠다.
직지사의 가을을 빛내주는 배롱나무꽃 ‘맛집’은 대웅전을 왼쪽으로 지나면 나타나는 비로전과 사명각 앞에 있다. 배롱나무 수십 그루가 군락을 이뤄 한눈에 보기에 황홀한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사찰 건물을 배경으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꽃 풍경 사진을 찍어보면 이곳이 왜 ‘꽃 사진 맛집’인지 알 수 있다. 사진을 찍는 각도에 따라 사찰이 꽃에 덮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온 세상이 꽃 천지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산 북구~사상구를 잇는 낙동강 강변도로에 배롱나무가 수백 그루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지난 여름부터 꽃이 화사하게 피어 오랫동안 꽤 멋진 풍경을 연출하지만, 솔직히 직지사 배롱나무 서너 그루에 비할 바는 아니다.
놀랍게도 배롱나무꽃은 ‘부처꽃과’라고 한다. 솔직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왜 부처꽃과일까. 알고 보니 부처꽃이라는 게 있는데 과거 신도들이 부처에게 이 꽃을 바쳤다고 한다. 배롱나무꽃도 부처꽃과 같은 과에 속하니 부처에게 바쳐도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 같다.
배롱나무 줄기는 아주 특이하게 생겼다. 이리저리 꼬인 게 신비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꽃도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화려하거나 아름답지는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은은하면서 고급스럽고 도도한 느낌을 준다. 전국 각지 절에서 배롱나무를 많이 키우는 것은 부처의 심상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배롱나무꽃이 화사하게 핀 사명각은 임진왜란 때 승병으로 나서 큰 공을 세우면서 나라를 구한 경남 밀양시 출신의 사명대사를 모신 곳이다. 사명대사는 부모를 잃고 방황하다 이곳에서 출가해 명승으로 성장했다. 나중에는 이곳 주지가 되기도 했다. 그가 출가하기 전에 누워서 잠들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바위가 아직 절 입구에 놓여 있다.
배롱나무꽃에 흠뻑 취해 한참이나 머물다 마침내 발걸음을 돌린다. 대웅전으로 다시 돌아가 절을 천천히 한 바퀴 둘러본다. 어찌된 노릇인지 사찰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아담하면서 우아하고 차분하면서 경건한 기분이 심신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직지사는 조용하면서 깔끔하고 단정한 사찰이다. 큰 사찰인데도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고 차분하다. 가람이 한두 채가 아니지만 복잡하거나 지저분하거나 어지럽지 않다. 대웅전, 명부전, 비로전 등 모든 가람과 탑, 마당은 제자리를 잘 찾아 차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절 주변을 둘러싼 산의 숲뿐 아니라 절 안에도 곳곳에 적절하게 수풀이 조성돼 있어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준다.
직지사의 풍미를 더 즐기면서 마음을 달래고 싶다면 직지사 인근 암자를 둘러보면 된다. 직지사는 원래 큰 절이어서 과거에는 소속 암자가 37곳에 달했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돼지금은 명적암, 은선암, 운수암, 중암, 백련암 5곳만 남아 있다. 직지사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명적암까지 가는 길은 최고의 풍광을 자랑한다. 게다가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느린 산책을 즐기기에 좋은 코스다. 은선암까지 가는 길은 경사가 약간 가파르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장점이다.
■김천시립박물관
김천시는 직지사 인근을 관광단지로 조성했다. 직지문화공원, 친환경생태공원은 물론 사명대사공원도 있다. 그 중심에는 김천시의 역사를 담아 2020년 개관한 김천시립박물관이 있다.
김천시립박물관은 아주 화려한 시설은 아니다. 하지만 대나무숲 뒤에 숨은 작은 건물은 꽤 운치가 있어 보인다. 게다가 새 건물이어서 내부 전시실도 깔끔하고 동선도 편리해 돌아보는 재미가 넘친다.
김천시립박물관에 들어가면 먼저 곰 한 마리가 반겨준다. 김천시 수도산에서 살다 2023년 불의의 사고로 익사한 반달가슴곰 오삼이 초대형 그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났지만 김천시 SNS 홍보 캐릭터가 되는 등 아직도 지역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김천시립박물관 소장품은 400여 점으로 많은 편은 아니다. 천천히 걸어도 30분 정도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곳곳에 각종 체험 시설이나 영상관이 설치돼 여유를 가지고 즐길 수 있다.
김천시립박물관이 세워진 사명대사공원에서는 가을 분위기가 진하게 느껴진다. 박물관 주위를 에워싼 단풍나무는 발갛게 물들었다. 공원에는 숙박시설도 마련돼 있어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하룻밤 묵어가도 된다. 사명대사공원의 하이라이트는 한가운데에 우뚝 선 평화의 탑과 물레방아다. 아쉽게도 평화의 탑 꼭대기 층에는 올라갈 수 없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꽤 멋질 것으로 예상되는데 출입구는 굳게 닫혔다.
사명대사공원 여행의 종점은 세계도자기박물관이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시설이 작은 데다 전시물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세계 여러 나라의 도자기가 골고루 전시된 만큼 돌아 나오는 길에 한번쯤 들어가 볼만한 곳이다.
여행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간다. 직지사 일대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은 산채정식이다. 여러 식당에서 산채정식이라는 이름을 단 음식을 판다. 그중 중소기업벤처부 선정 백년가게라는 곳에 들어갔다. 기대한 것보다 상차림이 훌륭하고 맛도 뛰어나다. 여행의 세 가지 즐거움은 보고 사고 맛보는 것이라는 데 그중 최고는 맛이 아닐까.
남태우 기자 le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