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상탈 러닝 논쟁을 지켜보며
동아대 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최근 즐거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함께 러닝을 하는 것이다.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한마디 말도 섞지 않고 뛰기만 하지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같은 호흡으로 뛰고 있자면 딸아이의 마음이 어렴풋하게나마 전해지기도 한다. 또 힘든 달리기가 끝나고 하이파이브를 할 때면 말은 안 해도 전우애와 같은 가족애가 생긴다.
그런데 며칠 전 딸아이가 갑자기 러닝 가기가 싫다고 했다. 딸아이도 내심 나와 함께 러닝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터라 그 이유를 물어봤다. 아이가 말하길 러닝 자체는 싫지 않지만 집 앞 공원에는 웃통을 벗고 뛰는 아저씨들이 많아 왠지 징그럽고 위화감이 들어 러닝 가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날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공원으로 차를 타고 이동해 러닝을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행법상 처벌 대상 아니라고 하지만
법은 최소한의 기준, 최선의 답 아냐
제재 아니어도 '탈의·착용 원칙' 필요
공동체 공론장 만들어 '최적선' 찾길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상의 탈의 러닝에 대한 의견을 찾아보았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되고 있어서인지 뉴스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상의 탈의 러닝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된 논지는 이렇다. 상의 탈의 러닝 반대 측은 공공장소에서 맨몸을 드러낸 채 운동을 하면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 상의를 벗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 측은 상의 탈의 운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이를 규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입장이다.
찾아보니 실제로 공공장소에서 상의 탈의를 하는 행동에 대해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2015년 경남 양산에서 한 남성이 집 근처 공원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일광욕을 하다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이라는 경범죄처벌법의 과다 노출 조항에 따라 범칙금을 부과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 헌재는 조항의 ‘지나치게 내놓는 것’, ‘가려야 할 곳’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당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후 헌재 결정에 따라 해당 조항은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성기, 엉덩이 등 신체의 주요한 부위를 노출해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과다 노출은 성기나 엉덩이로 특정되며, 상의 탈의를 하여 상체를 노출한 행위는 경범죄에 해당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없으니 괜찮다’는 주장은 우리의 정서상 용인되기 힘든 부적절한 상체 노출을 모두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테면 상의를 말아 올려 배를 드러내 놓거나 아예 상의를 탈의하고 다니는 이른바 ‘베이징 비키니’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법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해답은 아니다. 따라서 ‘불법이 아니니 해도 된다’는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을 위한 자제와 배려를 공공의 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상의 탈의 러닝을 일괄적으로 제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용 체육공원, 육상 트랙, 지정된 러닝 코스 등 운동 목적이 분명한 장소에서는 상의 탈의를 허용하고, 다목적 공원이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중 시설과 연계된 곳에서는 상의 착용을 기본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또 기타 판단이 어려운 장소의 경우 해당 시설의 관리 주체가 시설의 운영 목적과 이용객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용 규칙으로 상의 탈의 규정을 정하면 된다. 그리고 이용객에게 상의 탈의 가능 시간과 구획 등에 대한 구체적 안내와 완만한 계도를 병행한다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상의 탈의 논쟁을 지켜보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 방식이 지나치게 법조문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상의 탈의 문제를 두고 ‘법에 없으니 무조건 허용’ 대 ‘법을 만들어 처벌’이 맞붙는 장면은 우리 사회가 결과(처벌)만 원하고 과정(토론)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법은 범죄냐 아니냐를 가르는 이분법적 틀로 설계돼 있어 우리 일상의 미세한 맥락과 다양한 장면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논의는 거칠어지고 때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기도 한다. 결국 법은 사회 문제 해결의 ‘최저선’일 뿐 ‘최적선’이 아니다.
최적선은 법이라는 최저선 위에 공동체가 공론장을 열어 토론하고 합의할 때 비로소 그려진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성숙한 태도로 토의하고 그 결과 공동체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에 이를 때, 규제는 오히려 가벼워지고 자유의 폭은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