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황혼의 기도-밀레의 '만종'과 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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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만종, 1857~1859, 캔버스에 유화, 56 x 66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밀레, 만종, 1857~1859, 캔버스에 유화, 56 x 66 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기후 위기의 시대, 뜨거운 여름 햇빛 속에서도 저녁이 되면 서늘한 가을의 바람이 스며든다. 이 시기 해 질 녘,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황혼의 순간을 프랑스에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불렀다. 멀리 있는 짐승이 집에서 기르는 개인지, 야생의 늑대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시간대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정치적 은유로 말하자면 이 시간은 피아의 구분, 적과 아군의 구분이 어려운 순간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는 안전과 위험,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한다. 계절로 치면 늦여름에서 초가을, 수확을 마친 들판은 고요 속에 잠기고 고도가 낮아진 해는 빠르게 기운다. 밀레의 ‘만종’(1857~1959)은 이 시간대의 공기와 빛을 품고 있다.

이 그림이 완성되기 약 10년 전, 프랑스는 1848년 2월 혁명을 겪었다. 자유·평등·박애의 구호 아래 ‘7월 왕정’을 무너뜨린 제2공화국의 출범은 빛처럼 보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농민과 노동자에게 약속된 평등은 미완으로 남았고, 같은 해 6월 봉기는 무력 진압으로 끝났다. 이후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제2 제정으로 혁명은 빛이 바랬고, 해방의 낮은 저물며 억압의 밤이 시작되었다. 이후 급격히 자본주의화로 발전하는 도시, 심화하는 사회적 불평등, 도시 생활의 비인간화를 목격하면서 젊은 예술가들은 퐁텐블로의 시골, 바르비종에서 자연과 그 속의 농민을 그린다.

당시 비평가 일부는 밀레의 그림을 사회주의적 선동으로 의심했고, 제2 제정 관료들 역시 ‘불온할 수 있는 주제’라고 경계했다. 그러나 밀레 자신은 단지 인간과 노동의 존엄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혔다. ‘만종’을 ‘경건한 기도’로 보는 통상적 해석, 전경에 있는 감자 바구니를 아기의 관으로 본 달리의 정신분석학적 해석과 무관하게 밀레의 회화적 언어는 이 황혼의 감각을 한층 강화한다.

그는 절제된 붓 터치로, 거친 흙과 해가 진 하늘의 질감을 살렸다. 화면의 2/3 지점을 가르는 지평선은 두 인물의 상반신 2/3 지점에 걸쳐 있다. 이러한 안정된 구도와 달리, 두 인물을 감싸고 있는 전경 대지의 황토색, 원경 하늘의 청회색 색채 대비는 따뜻함과 서늘함이 동시에 감도는 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러한 경계의 색감이야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지닌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황혼은, 낮의 익숙함과 안전에서 밤의 위협과 낯섦으로 넘어가는 문턱이다. 그러나 밤은 숨을 고르며 새벽을 준비하는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 속 사물과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패배의 기억을 ‘침묵’이 아닌 ‘증언’으로 전환해야 한다. 다가올 밤이 우리를 삼키기 전에, 우리는 어떤 빛을 안고 그 밤을 건널 것인가?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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