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아닌 ‘AI와 바다’가 부산의 미래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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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부 이전·정부 AI 투자 흐름
‘해양수도’에서 시너지 효과 내야

기존 항만·물류 물리적 확대로는
데이터·자동화 시대 경쟁력 없어

스마트 항만·자율운항·북극항로
부산의 새 성장 엔진은 ‘해양 AI’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대자연의 시련에 맞서는 늙은 어부의 사투를 그린다. 험난한 파도와 상어 떼의 공격 앞에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는 인간 의지의 숭고한 승리다. 이 불굴의 정신이 부산에서 자조의 표현으로 변질된 대목은 무참하다. 젊은 세대가 떠나 활기를 잃으면서 노인과 바다뿐이라는 낙담이 뼈아픈 것이다.

부산은 항상 바다에 도전했다. 포기한 적이 없다. 바다에서 절망했던 적은 있어도 항상 희망을 건져 올렸다. 지금 부산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이 확정되면서 ‘글로벌 해양수도’ 도약이 가시화된 것이다. 해양수산 관련 기관, 기업, 연구소의 집적화도 본격 추진된다. 해양수도특별법과 국가 예산 등 법적, 제도적 지원을 받고 부산을 중심으로 한 해양권을 형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부산은 방향성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부산은 이미 항만·물류의 도시인데, 관성적인 몸집 불리기에만 치중해서는 금세 한계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산업 전환의 시대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 AI와 바다, 두 축이 교차하는 부산은 ‘해양 AI’에서 신성장 동력을 찾을 수 있다. 스마트 항만, 자율운항 선박, AI 기반 어업 관리,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등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해양 AI는 가 보지 않은 길이지만 부산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만들 수 있는 미래 전략이 될 수 있다.


부산은 스마트 항만, 자율운항 선박, 스마트 어업·양식, 해양 기후·바이오 분야에서 해양 AI 기술을 선점할 때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사진은 부산항 북항 개발 조감도. 부산은 스마트 항만, 자율운항 선박, 스마트 어업·양식, 해양 기후·바이오 분야에서 해양 AI 기술을 선점할 때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사진은 부산항 북항 개발 조감도.

해양 AI, 수산·항만에서 북극항로까지

해양산업은 AI와 결합할 때 비약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우선 항만·물류는 AI 기술로 성장이 유망한 분야다. 부산항에 AI 기반 자율 하역 장비와 물류 최적화 시스템을 구축하면, 작업 효율은 높이고 안전사고는 크게 줄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치열한 기술 경쟁이 붙은 자율운항 선박도 부산이 선도할 수 있다. 국제해사기구(IMO)가 자율운항 규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부산은 세계적 항만 인프라와 조선·해양플랜트 산업 기반을 동시에 갖춘 드문 도시다.

스마트 어업과 양식업도 부산의 기회다. 해양 빅데이터와 AI 알고리즘을 활용하면 어군 분포, 수온·해류 변화, 양식장 질병 예측을 정밀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수산업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기후변화에 따른 리스크 관리에도 효과적이다. 나아가 해조류를 활용한 바이오 신소재, 해양 신약 개발 등 신산업 영역에서도 AI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부산은 북극항로 개척의 첨병이다. 부산항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핵심 거점으로, 러시아 무르만스크와 직선으로 연결되는 북극항로의 남쪽 끝에 자리한다. 부산이 북극항로의 기착지가 된다면 글로벌 해운 질서에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항로가 기상·해빙 상황에 따른 리스크 관리가 필요한데도 항행 데이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해양 AI의 역할이 커진다.

AI 기술을 활용하면 위성관측·기상데이터·해류 패턴을 실시간 분석해 최적 항로를 제시할 수 있다. 자율운항 선박 기술과 결합되면 안전성을 높일 수 있다. 또한 쇄빙선 운영 효율화, 항만 접안 예측, 긴급상황 대응 시뮬레이션까지 가능하다. 부산이 북극항로 관련 데이터를 축적하고 AI 알고리즘을 개발한다면 환적 거점을 넘어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지위를 선점할 수 있다.


해수부 이전을 계기로 북극항로 개척이 빠르게 추진되는 가운데 한화오션이 추진 중인 차세대 쇄빙연구선 조감도. 한화오션 제공 해수부 이전을 계기로 북극항로 개척이 빠르게 추진되는 가운데 한화오션이 추진 중인 차세대 쇄빙연구선 조감도. 한화오션 제공

■ 국가 AI 투자·해수부 이전, 부산의 기회

정부는 2026년도 예산안에서 AI 투자에 사상 최대 규모인 10조 원 이상을 책정했다. 지난해 3조 원대와 비교하면 세 배 가까이 늘었다. 특히 ‘피지컬 AI’라 불리는 분야, 즉 항만·물류·자율운항 선박·로봇·스마트 제조와 같은 실세계 적용형 AI에 무게를 두고 있다. 부울경에는 해양항만 AX(인공지능 전환)에 370억 원이 배정됐다.

AI를 통한 해양산업의 부흥 측면에서 부산은 이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산과학기술고등교육진흥원(BISTEP)이 올 5월 발간한 ‘해양수산 AI 연구개발 동향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2019~2023년 해수부 소관 AI 관련 국가연구개발과제 1033건 중 부산이 356건(34.5%)을 수행해 수도권(서울·경기·인천)의 37.0%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부산 산·학·연의 유기적 협력은 해양수산 AI 연구개발에서 선도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한다. 또 부산정보산업진흥원은 지난달 부산 해양 AI 융합 신산업 육성을 목표로 ‘해양 AI TF’와 ‘해양 AI 전략위원회’을 신설하고 로드맵 수립, 국비 연계 프로젝트 기획, 인재 양성에 나섰다.

그러나 아직은 실망과 우려가 큰 게 현실이다. 내년 해수부 예산이 전체의 1%에도 못 미치는 데서 국정에서 해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더구나 부산시가 신청한 해양과 AI 신규 사업 상당수가 예산 심의 단계에서 탈락하기도 했다. 이는 ‘해양수도 부산’ 비전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다. 스마트 항만과 자율운항 선박, 북극항로 데이터 허브 구축은 모두 초기 투자 없이는 불가능하다. 데이터 수집·가공, 알고리즘 개발, 테스트베드 구축에 장기간 안정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현재 구조로는 단편적 실증에 그칠 우려가 크다. 정부의 추가 예산 편성과 지원 확대에 지역의 힘을 모아야 할 대목이다.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부산항 대교를 가로지르는 초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김종진 기자 kjj1761@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해 부산항 대교를 가로지르는 초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김종진 기자 kjj1761@

■ 과제는 인재, 데이터, 제도

해양 AI 도시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가장 큰 과제는 인재 확보다. 현재 국내 AI 전문 인력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부산에서 해양 특화형 AI 대학원과 연구소가 활성화되지 않으면 해양수도 비전은 언감생심이다. 현장 기반 교육과 연구, 산학 협력 네트워크가 절실하다.

그 다음은 데이터 거버넌스다. 항만 물류, 선박 운항, 어업, 기후·해류 데이터는 공공 기관과 민간 기업에 분산돼 있다. 이를 표준화하고 통합 관리하는 플랫폼 없이는 AI 실증도, 산업화도 어렵다. 데이터 독점 문제를 해소하고 공유 체계를 만드는 것이 필수다.

제도적 뒷받침도 핵심적인 과제다. 부산시와 정치권은 ‘해양수도특별법’ 제정을 추진 중이다. 법안에 규제 특구 지정, 세제 혜택, 기업 지원 방안이 담겨야 기업 유치 효과가 생긴다. 특히 스마트 항만·자율운항 선박·해양 빅데이터 관리 같은 신산업 육성이 법적 틀 안에서 보장될 수 있게끔 AI와 데이터 산업 지원책은 구체적으로 명시돼야 한다.

해수부 이전의 효과와 정부의 AI 투자 흐름은 부산에서 교차되고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 지금은 부산이 항만·물류의 도시를 넘어 해양 AI 허브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다. 오늘날 부산 바다가 던지는 화두는 ‘노인과 바다’의 도전 정신이다. 게임 체인저인 AI를 앞세워 바다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이 북극항로로 연결될 때, 또 여기에 해양 AI 기술이 입혀질 때, 부산은 명실상부 글로벌 해양수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AI와 바다가 어우러지는 새로운 해양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야 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높여 있다.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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