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기업의 미래를 팔아 주가를 올릴 순 없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정부 증시 부양 맞춰 상법 개정 ‘초읽기’
1400만 개인투자자에겐 반가운 소식
주주 이익 높이려다 기업 가치 놓칠 수도
자본주의 틀 바꾸는 일, 신중 기해야
상법이 시행된 1963년 이후 ‘역대급’이라고 불리는 상법 개정이 초읽기에 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르면 3일 국회 본회의에서 상법 개정안을 처리할 방침인데, 통과되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일반 법안 중 국회 문턱을 넘는 1호 법안이 된다.
그만큼 이재명 대통령의 증시 부양 의지가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수도권에 집이 없는 사람들을 ‘벼락 거지’로 만드는 수도권 부동산 가격 폭등을 가라앉힐 대안으로 주식시장 활성화를 꼽고 있다. 여당도 ‘코스피 5000 시대’로 가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상법 개정이라고 보고 법 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동안 상법 개정안에 반대해 온 국민의힘도 1400만 명에 달하는 개인투자자 여론과 코스피 3000 회복에 따른 증시 활성화 기대감을 의식한 듯 전향적인 검토 입장으로 돌아섰다.
내용을 보면, 사실상 윤 전 대통령의 거부권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진 안으로 돌아왔다. 민주당은 지난 3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현행 ‘회사’에서 ‘주주’로까지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개정안을 냈으나 대통령 거부권 이후엔 감사 선출시 최대주주 의결권 3% 제한, 집중투표제도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을 추가했다. 개미투자자 입장에선 높은 배당금과 주가 상승을 이끌어 낸다는 데 반갑지 않은 이가 있을까.
그렇다고 해도, 상법 개정은 더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장하준 런던대 교수는 한국 주주 자본주의가 시동을 걸고 있는 것과 관련해 “기업의 미래를 팔아 지금의 주가를 올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인데, 주주 중심의 관점으로는 노동자나 소비자, 국가 경제는 중요하지 않고 기업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뽑아낼지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경영진의 최우선 의무가 주주 이익이 된다면 다른 사회적 가치는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해고가 이윤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야 하고, 연구개발비보다 주주 배당이 우선 된다면 그에 따라야 한다. 외국 투기 자본이 이사회를 장악해 경영권 개입에 나서거나 규제 회피를 위해 해외로 이전해도 막을 도리가 없다.
미국도 생산설비 해외 이전으로 결국 제조업 불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제조업 이외 산업들은 아무리 고부가가치라고 해도 광범위한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 지금 트럼프 미 대통령이 제조업을 다시 살리겠다며 관세를 무기로 ‘패악질’을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지난 30여 년간 주주의 회사 지배로 주식시장 고유 기능이라 할 수 있는, 투자금을 회사로 공급하는 기능이 상실되다시피 했다. 오히려 회사가 순수익보다 많은 돈을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 사용하면서 회사 돈이 빠져나가고 있다. 〈금융과 회사의 본질〉의 저자 김종철 서강대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미국 상장사들은 1971년부터 1981년까지 이윤의 50% 정도를 주주에게 환원했다. 그러나 1982년부터 최근까지는 평균적으로 이윤의 123%를 주주에게 내놓고 있다.
물론 이번 상법 개정은 기업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태광산업이다. 태광산업은 자사주 전량(지분율 24.41%)을 바꿀 수 있는 3186억 원 규모의 교환사채(EB)를 발행하려다 사외이사의 반대에 부딪히는가 하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정정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강행 입장을 밝혔고, 자사주 소각 의무화 방침을 내세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자 자사주를 담보로 교환사채를 발행하는 꼼수를 썼다는 비판을 받는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도 무려 3조 6000억 원의 유상증자를 발표했다 소액주주 반발을 샀다. 지난해엔 두산그룹이 연간 수천억 원의 흑자를 내는 두산밥캣을 만년 적자 회사인 두산 로보틱스와 합병하려다 주주 반발에 무산됐다.
“장기 투자하래서 우량주를 샀더니, 새끼를 낳았는데 그 새끼는 내 것이 아니었다”는 이 대통령의 말도 그동안 주주들이 당한 피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국 증시는 지배주주 지배력이 강하다 보니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발목 잡혀 있고,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봐온 건 맞다. 하지만 머지 않아 기업 기능이 산업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가 아닌 ‘주가 상승’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지 물어야 할지 모른다. 주주가 회사 주인으로 자리매김 하는 순간, 경영진, 노동자, 하청업체, 지역사회, 국가는 ‘외부인’으로 전락한다. 3일 상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그 이후로는 주주 자본주의가 가져올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는 보완책들이 시급하게 마련돼야 한다. 주주 이익만을 위한 마구잡이식 소송이 남발되지 않으려면 배임죄와 처벌 조항들에도 안전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숙의도 더 필요하다. 한국 자본주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는 '큰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