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부터 ‘플로우’까지…BIFF 화제작 4편 감상기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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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11일 막을 내립니다. BIFF는 여느 때처럼 시네필의 이목을 끄는 화제작들을 초청했습니다. 기자도 총 8편의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작품이나 관객들의 기대가 컸던 작품 4편을 꼽아 후기를 남겨 보려 합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계 문제아인 조슈아 오펜하이머의 첫 장편 극영화인 ‘디 엔드’와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 애니메이션계 칸영화제로 불리는 안시국제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심사위원상·음악상 등 4개 부문에서 수상한 애니메이션 ‘플로우’, 그리고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 심사위원상과 남우주연상 수상작인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입니다.


영화 ‘디 엔드’.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디 엔드’.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불친절하고 불편한, 그러나 오묘한 매력의 ‘디 엔드’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그 유명한 ‘액트 오브 킬링’(2012)과 ‘침묵의 시선’(2014)을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입니다. 그의 첫 장편 극영화인 ‘디 엔드’는 세상이 종말한 지 20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아포칼립스 뮤지컬 장르입니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데, 영화 ‘1917’(2020)로 얼굴을 알린 배우 조지 매카이와 베테랑 배우인 틸다 스윈튼 등 캐스팅도 이목을 끕니다. 영화 팬들 입장에선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실제로 올해 BIFF에서 순식간에 매진을 기록했고, 기자도 힘겹게 표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내용은 이렇습니다. 인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가족은 소금 광산 깊숙한 곳에 지어 둔 호화 벙커에서 풍족한 생활을 합니다. 벙커에서 태어난 아들(조지 매카이)은 한 번도 바깥 세상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부모의 노력 덕에 나름대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종말 이전처럼 성탄절이나 핼러윈 같은 명절을 기념하고, 아버지의 자서전을 집필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어딘가 결핍돼 있고 결함이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부족할 것도 없어 보이는 이 가족의 일상은 한 생존자의 등장과 함께 일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가족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벙커 입구에 나타난 젊은 여성(모지스 잉그럼)을 보고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그를 일단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바깥 세상에서 온 여성은 가족들, 특히 아들에게 아주 새로운 자극제입니다. 여성과 어울리던 아들은 종말 이전의 가족사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고, 꽁꽁 감춰 둔 가족들의 비밀이 종말을 맞습니다.

영화는 기괴한 성격을 가진 등장인물들 탓에 러닝타임 내내 약간의 불편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유난히 까탈스럽고 깐깐한 엄마(틸다 스윈튼)는 친절하게 말할 때도 묘한 긴장감을 일으키고, 쾌활해 보이는 아빠(마이클 섀넌) 역시 과거를 부정하면서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타인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둔감한 아들도 불편한 상황을 연출하는 데 일조합니다.

뮤지컬 영화인 ‘디 엔드’는 노랫말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BIFF 측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각자를 억누르고 있는 죄책감이 자기부정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다만 영화는 그리 재미있지 않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동반하는 연출과 뚜렷한 갈등도, 기승전결도 없는 애매모호한 흐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공간적 배경이 벙커 내부로 한정된 탓에 화면이 단조롭기도 합니다. 정교한 미장센과 조명 및 색감의 적극적인 변화로 이를 탈피하려 했지만 역부족입니다. 뮤지컬 영화인데도 수록된 넘버들 역시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난 직후에도 기억에 남는 넘버가 없습니다.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심오한 메시지는 일단 차치하겠습니다. 보통의 관객 입장에서 이 영화는 난해하고 지겨운 작품일 것입니다. 기자 옆에 앉은 관객은 결국 졸음을 참지 못하고 코를 골았습니다. 극장을 나서면서 다른 관객들의 대화를 엿들어보니 졸렸다는 관객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영화 ‘아노라’.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아노라’.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웰메이드 블랙코미디가 선사하는 공동 경험…‘아노라’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아노라’ 역시 예매가 힘들었던 작품입니다. 지난 3일 상영 당시 800석이 넘는 규모를 자랑하는 하늘연극장 좌석이 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영화는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의 숀 베이커 감독이 연출과 각본, 편집까지 도맡은 코미디 드라마입니다. 우즈베키스탄계 미국인이자 뉴욕에서 ‘애니’라는 이름의 스트리퍼로 일하는 여성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애니는 고객으로 만난 러시아 재벌 2세 청년 반야(마르크 에이델스테인)와 가까워집니다. 둘은 점점 서로에게 이끌리고,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반야는 미국 국적도 얻을 겸 충동적으로 애니에게 청혼합니다. 그렇게 반야와 애니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혼까지 해버립니다.

그러나 행복하던 신혼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결혼 소식을 전해 들은 반야의 부모는 노발대발하며 미국에 있는 하수인 3인에게 어떻게든 혼인무효소송을 진행하라고 지시하고 직접 뉴욕행 비행기에 오릅니다.

‘아노라’는 극장만의 매력인 공동 경험을 느끼기 좋은 영화입니다. 철없는 부부를 떼어놓기 위해 반야를 찾아온 하수인 3인과 애니의 갈등 구조를 통해 만들어내는 웃음 포인트가 상당히 재치 있습니다. 공개된 영화 시놉시스의 설명처럼, 하수인 3인이 들이닥치자 반야는 애니를 버린 채 혼자 달아난 뒤 잠적해버립니다. 애니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수인 3인은 혼인무효소송을 성사시키기 위해 반야를 찾아 곳곳을 헤매고 다닙니다.

영화 ‘아노라’.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아노라’.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이 과정에서 골 때리는 ‘대환장’ 쇼가 펼쳐지고, 현실적이고 직설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유머가 이어집니다. 극장 곳곳에선 연신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고스란히 조명하는 대사와 상황 설정이 헛웃음과 성찰을 동시에 유발합니다.

‘아노라’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영화 중에서도 선정적인 묘사가 많고 수위도 강한 편입니다. 그런 만큼 주연인 마이키 매디슨의 열연이 돋보입니다. 하수인 3인 중 한 명인 ‘이고르’ 역의 유리 보리소프도 인상적인 연기로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보리소프는 ‘6번 칸’(2023)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2023)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라 작년에 영화를 열심히 본 시네필에겐 익숙하고 반가운 얼굴입니다.

영화는 올해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았고, BIFF에서도 한동안 뜨거운 박수가 이어지는 등 전 세계 관객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아노라’는 당장 내달 6일 개봉이 확정됐습니다.

영화 ‘플로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플로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귀여운 고양이의 대견한 성장기 ‘플로우’

지난 4일 오후 8시, 4000석이 넘는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의전당 야외극장이 관객들로 가득 찼습니다. 임시로 의자를 추가 배치해야 했을 정도로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작품 ‘플로우’가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이유는 뭘까요.

‘플로우’는 애니메이션계 칸영화제로 불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관객상, 심사위원상, 음악상, Gan Foundation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한 화제작입니다. 원인 모를 대홍수가 벌어진 지구에서 주인공인 검은 고양이가 살아남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고양이는 물을 무서워하고 다른 동물들도 멀리 합니다. 그런데 홍수 때문에 여러 동물과 함께 한동안 배 위에서 지내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싫어하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마주하게 된 고양이는 이 기묘한 모험에서 연대와 교류를 경험하고 점차 성장합니다.

영화의 최고 매력 포인트는 눈을 사로잡는 영상미입니다. 안시영화제에서 ‘어웨이’(2019)로 콩트르샹상을 수상했던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동물들의 움직임을 완벽히 재현하면서도 캐릭터들을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모션 그래픽으로 구현한 움직임은 아주 현실적인데, 부드러운 모델링을 통해 귀여운 이미지를 유지한 겁니다.

이 탁월한 완급 조절로 관객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색다른 영상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예컨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 킹’(1994)은 특유의 만화적 연출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개성 강한 그림체로 구현한 영화 속 동물들은 창조된 가상의 캐릭터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런 만화영화의 대척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실사영화입니다. 2019년 리메이크한 실사영화 ‘라이온 킹’은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실제 동물과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플로우’는 만화영화와 실사영화의 경계에 있는 듯한 연출로 우리에게 익숙하던 애니메이션들과는 다르다는 인상을 안깁니다.

영화 ‘플로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플로우’.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의 또 다른 주요한 특징은 대사가 없다는 겁니다. 동물들의 울음소리와 표정, 동작만으로 감정을 표현합니다. 그런데도 관객이 감정선에 충분히 이입할 수 있을 정도로 연출에 세심하게 신경 썼습니다.

캐릭터들의 개성도 돋보입니다. 예민하고 내성적이지만 때로는 용맹하고 본능에 충실한 고양이, 귀엽고 사교적인 래브라도 리트리버, ‘귀차니즘’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든든할 땐 든든한 카피바라 등 캐릭터마다 고유한 개성을 부여했고, 이들의 조화로 이끌어내는 연대라는 메시지가 마음을 움직입니다. 겁 많던 고양이가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180도 변하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질발로디스 감독은 이날 영화 상영에 앞서 관객과 만난 자리에서 사실적인 묘사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밝혔습니다. 예를 들어 카피바라 캐릭터의 울음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동물원을 찾아갔는데, 도통 울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울음소리를 따냈지만, 예상과 달리 너무 음이 높아 영화에 쓰기엔 부적절했습니다. 결국 카피바라가 내는 소리는 가장 이미지가 비슷한 새끼 낙타의 울음소리로 대체했습니다.

영화는 칸영화제에서도 극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플로우’를 관람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내가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꿈꾼다면 ‘플로우’가 웅장하고 숨 막히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내년 상반기에 국내 개봉할 예정입니다.

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완성도 높은 담백한 인권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보리스 로즈킨 감독은 세 번째 장편 연출작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에 대해 “흔히들 알고 있는 관광지로서의 파리와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했습니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서 심사위원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이 영화는 유럽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이민자 문제를 다룹니다.

파리에서 자전거로 음식 배달 일을 하는 주인공 술레이만(아부 상가레)은 아프리카 기니 출신의 난민 신청자입니다. 영화의 원제인 ‘술레이만의 이야기’처럼, 극은 철저히 술레이만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술레이만이 합법적 난민이 되려면 필요한 게 너무 많습니다. 이틀 뒤면 난민 심사 면접인데, 노숙자 수용소에서 지내는 배달 노동자 신분인 술레이만에게 하루는 너무 짧습니다. 그가 시간에 쫓기는 이유는 결국 돈 때문입니다. 필요한 서류를 얻으려면 난민 브로커에게 돈을 줘야 하는데, 난민이 합법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마땅히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배달 허가증을 빌려서 일을 하다 보니 본인 확인 절차가 필요할 때마다 허가증 주인에게 달려가야 합니다. 또 허가증을 빌려준 대가로 계정 주인에게 돈을 줘야 하니 다른 배달부보다 갑절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수용소에서 잠을 자려면 버스 막차 시간에 늦지 않게 정류장에 도착해야 합니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쁜 와중에 짬을 내 브로커에게 교육을 받고, 심사를 통과할 수 있을 만한 가짜 사연을 통째로 외워야 합니다.

영화는 술레이만의 숨 가쁜 48시간을 속도감 있게 그려 내 관객이 그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끔 만들었습니다. 핸드헬드 촬영을 적절히 사용한 현장감 넘치는 연출이 박진감을 더합니다.

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 ‘어느 파리 택배기사의 48시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우여곡절 끝에 48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술레이만은 면접관 앞에서 준비해 둔 거짓 사연을 늘어놓습니다. 뻔하고 식상한 가짜 이야기를 듣던 면접관은 진짜 사연을 말해보라고 요구합니다. 잔뜩 긴장한 술레이만은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영화 클라이맥스는 바로 이 마지막 신입니다. 정신 없이 흘러간 48시간 동안 벌어지는 사건 사고로 켜켜이 쌓아 올린 긴장감이 주연 배우의 열연과 맞물려 폭발적인 몰입감을 낳습니다.

영화는 유럽 난민 수용 시스템의 맹점을 꼬집는 한편 휴머니즘과 온정주의를 불러일으킵니다. 순수하지만 너무도 불행한 청년에게 누구나 연민을 느끼고 그를 응원하게 될 것입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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