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 원 받고 넘겼다” 당시 부산 경찰 절반, 부랑인 인계에 관여
[형제복지원 진실 규명 조사 결과] 국가기관도 공범이었다
2년간 경찰 2700여 명 관여 확인
경범죄위반자도 자의적으로 인계
북한서도 형제복지원 악명 인지
보안사는 실상 알고도 공작 활동
부산시는 박인근 불구속 건의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부랑인으로 지목된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가 형제복지원에 가둘 수 있도록 한 규정 자체가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내무부 치안본부의 경찰업무 지침, 내무부 훈령 제410조가 문제의 규정들인데, 해당 규정들은 법률유보 원칙과 명확성 원칙, 과잉금지 원칙, 적법절차 원칙, 영장주의 원칙, 체계 정당성을 모두 위반했다. 이를 근거로 형제복지원 사건을 명확히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로 판단한 것이다.
■경찰은 형제복지원 ‘하수인’(?)
이번 조사에서 경찰이 형제복지원에 어떻게 협조했는지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났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형제복지원 신상기록 카드’ 245건을 통해 최초 단속 주체를 확인했는데, 경찰이 210건으로 85%를 차지했다. 경찰이 압도적으로 가장 많은 수용인을 형제복지원에 인계했다는 점에서 형제복지원으로 수용되는 첫 과정을 경찰의 단속으로 볼 수 있다. 이와 함께 ‘1985년 신병인수인계대장’(3948건)과 ‘1986년 부랑인수용일보’(3896건) 분석 결과, 2년간 부랑인 단속·인계에 관여한 경찰과 공무원은 최소 3000여 명으로, 이 중 경찰은 2700여 명으로 밝혀졌다. 당시 부산시 경찰 총 정원이 5808명이므로 경찰 전체 인원의 절반 이상이 부랑인 단속·인계에 관여한 것으로, 경찰이 사실상 형제복지원의 ‘하수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등 절차를 무시한 경범죄 위반자나 소년범에 대한 자의적인 강제수용도 경찰의 불법행위로 꼽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구류, 과료 등의 처분으로 끝내야 할 경범죄처벌법 위반자를 ‘처벌’ 혹은 ‘보안처분’ 목적으로 형제복지원에 인계한 사례를 확인했다. 금정경찰서와 부산진경찰서 등의 즉심사건부, 구류자명부 등을 확인한 결과 7725명 중 105명이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이력이 있었다.
경찰의 부랑인 단속과정에서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다는 피해자 증언은 즐비하다. 피해자 A 씨는 “1980년 저녁 10시경 식당 일을 마치고 고향 김천에 가려고 부산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경찰과 사복 입은 사람이 와서 파출소로 끌고 갔다”며 “차표를 보여 주면서 고향에 가려는 길이라고 했는데도 강제 연행했다”고 증언했다. B 씨는 “절도 혐의로 구속영장 대기 중이었는데 형제복지원 단속반 소대장이 나를 인계하는 대가로 구포역 파출소 경찰관에게 1만 원을 줬다”면서 “그 경찰관은 ‘부산 시내가 다 박인근이 돈인데 왜 이것밖에 안 주냐’고 말했다”고 진술하는 등 경찰과 형제복지원 사이 유착 정황을 증언했다.
■인권보다 '불순분자' 색출이 우선
북한도 형제복지원의 악명을 인지하고 있었다.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는 1985년 3월 29일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 신 모 씨를 신문하면서 북한이 신 씨에게 부랑아가 가장 많은 지역이 어디인지, 부산 형제복지원에 입소할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문의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보안사는 또 납북됐다 귀환한 어부 김 모(당시 29세) 씨가 1985년 11월 형제복지원에 자원 입소한 사실을 알고, 김 씨를 감시하기 위해 보안사 요원을 위장 침투시켰다. 이른바 ‘갈채공작’이 그것이다.
당시 보안사는 형제복지원에 대해 ‘교도소보다 더 강한 규율과 통제를 하는 곳’으로 판단하는 등 인권침해 실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나, 문제 해결 노력 대신 잠재적 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한 공작을 벌인 것이다. 이후 불순분자로 지목된 김 씨는 1987년 1월 30일 연고자 인계로 퇴소했고, 보안사는 동향 감시 결과 특이점이 없어 공작을 종결처리했다.
이번 진실규명에서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주재로 관계기관이 모여 형제복지원 대책회의를 했다는 보안사 문건도 최초로 공개됐다. 1987년 3월 24일 안기부 2국장 주재로 안기부 회의실에서 ‘형제복지원 관련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렸다. 형제복지원 원생 30여 명이 집단 탈출해 복지원 실태를 폭로한 다음 날이다. 3월 26일에는 청와대 정무 2수석, 안기부 2국장, 내무부 차관, 대검 차장, 치안본부장, 총리비서실장, 부산시 부시장 등 고위급이 참석한 가운데 형제복지원 개편 방안을 논의했다.
■부산시의 박인근 전방위 비호
1986년 말부터 형제복지원 수사가 본격 시작되자, 부산시는 박인근 비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박인근 구속 다음 날인 1987년 1월 18일 부산시 사회과는 “박인근이 국민포장,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바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도피할 염려가 없다”며 불구속 입건을 보건사회부에 건의했다. 1990년 5월 부산시 북구청은 현실적 측면을 고려할 때 박인근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단, 박인근과 관련된 사람들을 재육원(형제복지원 법인) 이사로 선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결국 1990년 10월 15일 회의에서 이사 5명 전원 교체가 결정됐는데, 새 이사진은 박인근의 측근들이었고 박인근은 1992년 12월 21일 법인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 , 곽진석 기자 kwa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