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사는 세상]<1>김성초씨 일가족의 제언
'인간이 주인되는 사회 만들어요'
연휴 계획을 짜던 김성초씨 가족은 부산일보 기자로부터 한 가지 제의를 받았다.
"부산일보 신년 기획시리즈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주십시오.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새천년엔 어떤 일들이 이루어져야 하는가를 선정해주시면 우리 기자들이 직접 취재해서 보도하겠습니다."
김씨는 즉각 가족회의를 소집했다."개성"하면 자다가 "내 이름 불렀쑤?"라며 벌떡 일어난다는 김씨 가족.앞뒤 잴 것도 없이 찬성했다.
김성초씨 가족은 부산 금정구 부산대 앞에서 가족 공동으로 외국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다.먼저 원장이자 개성 9단인 김성초씨(40).불혹의 나이에 불구하고 머리에는 노란색 물을 들였다.
"새로운 생활문화가 사람 사는 세상의 전제 조건이라고 봅니다.물질적인 환경변화에만 주목하지 말고 우리 주변의 생활에서 올바른 정신문화가 스며들도록 해야 겠지요.21세기는 정보화의 시대이므로 사이버공간의 활용도 필요합니다."
김성초씨는 자신의 노랑머리를 카메라 앞에 들이밀며 계속했다.
"적절한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제 머리도 그런 연유에서 물들인 겁니다.강사는 양복 입어야 하고 근엄해야 하고 몰라도 아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깨고 싶은 겁니다.새로운 방식으로,신선한 사고로 삽시다!"
박지은씨(28)는 김씨의 부인.남편보다 더욱 샛노랗게 물들인 그는 학원 홍보담당.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남편의 얼굴을 합성한 홍보 포스터와 "쉬리"를 본뜬 "쉬"지 않고 공부하"리"로 학생들의 눈길을 잡았다.네살짜리 아들 민준이가 있다.
"새천년엔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우리 사회는 속도를 숭배했고 결과에 조급했습니다.인간의 가치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선 삼풍사고도 없을 것이며 가스폭발도 없을 것입니다.인천호프집 사건도 돈 때문에 인간을 저버린,."
박씨의 말이 갑자기 끊겼다.사진기자가 셔터를 누르자 멋진 포즈를 잡느라고 야단이다.
다음은 원장의 동생 김성길씨(33).
서강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대기업 샐러리맨 직업을 작파하고 낙향,지역 영어교육 향상에 젊음을 불태우는 노총각이다.
"나는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소망합니다.빈익빈 부익부를 조장해온 재벌 중심의 성장정책,이익 창출을 위해서는 탈법도 용인되는 정글의 법칙 따위는 이제 지양되어야 합니다.유럽 선진국처럼 생산과 분배의 정의가 통용되는 건전한 자본주의가 정착되어야 해요."
이 집안에서 가장 진지한(?) 김성길씨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가족들은 학원 옆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그런데 민준이가 떼를 부렸다.햄버거를 먹으러 가자고.
가족들의 식단 당번인 민준이의 할머니 이무선씨(62).아들과 며느리의 염색한 머리가 집안망신 듀엣으로 시킨다는 분이다.당신은 쪽진머리를 고수하신다.햄버거의 포장지를 뜯으며 할머니가 말했다.
"쟁반에 담아 먹으면 될 터인데 웬 포장을 이렇게 많이 하누."
그러고보니먹을알맹이보다 버릴 껍데기가훨씬많았다.
"자기 편하려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죄악이야.환경친화적 소비문화,생태계와 공존하는 공간 복원이 새천년엔 급선무일 것 같다.민준이가 너희들 나이쯤 되었을 때 세상이 어떻게 되겠니?"
가족들은 한꺼번에 민준이에게 눈길이 갔다.1회용 물질로 가득한 음식을 먹는 민준이의 얼굴은 그러나 행복 그 자체이다.
"그래도 저 아이는 할머니보다 더 좋은 교육과 영양을 공급받는 행복한 세대잖아요."
김성초씨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뭐가 좋다는 거냐?"
민준이의 외할머니인 이징자씨(57)가 말을 받았다.이징자씨는 수강생의 영어공부 상담역을 맡고 있다.
"좋은 영양공급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 사회 한 편엔 결식아동과 학대받는 아동,거리를 배회하는 노인네는 왜 많아지는 거냐? 교육과 복지 해결 없이 사람 사는 세상을 떠들 수 있겠느냐?"
할머니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었다.
가사도 모를 음악이 귀를 찢을듯 울리지만 김성초씨 가족이 앉은 테이블엔 냉기와 무거움이 흘렀다.김성초씨는 노래가사가 "뭘 생각해? 맛있게 먹고 나가지"라는 소리로만 들렸다.
분위기를 깨려고 부인 박씨가 느닷없는 질문을 던졌다.
"근데 우리가 이렇게 마구 내뱉은 말을 진짜 기사화할 거예요? 우리가 말한 문제점을 진짜 시리즈로 보도할 거예요?"
그는 손가락을 꼽으며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새로운 생활문화 정착,경제정의의 실현,환경친화적 소비,생태계의 보전,소외된 자를 위한 복지제도,교육 바로 세우기,인간가치 중심의 사회,.으음,또 뭐가 있을까?
이상민기자 yeyun@p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