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원픽] 피리 연주자로서 마주한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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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소리숲 대표

내 이름은 빨강. 민음사 내 이름은 빨강. 민음사

나는 피리 연주자다. 1990년 처음 피리를 잡은 이래 40년 가까이 피리를 불어왔다. 어린 시절 피아노로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까지 합치면 내 삶은 온통 음악이었다. 피리는 유난히 호흡이 중요한 악기다. 몸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숨을 좁은 관 속으로 밀어 넣어 긴 선율을 버텨내야 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숨’이라는 것을 특별히 의식해 본 적이 없었다. 숨 쉬는 일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 가을, 나의 당연했던 세계가 무너졌다. ‘부산시민의 날’ 축하 공연 리허설 직후 갑자기 폐가 닫히는 듯한 공포와 함께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산소호흡기를 낀 채 대기실 바닥에 누워 있다가, 부축을 받아 겨우 연주를 끝내고 응급실에 실려갔다. ‘천식’ 판정을 받았다.

그날 이후 나의 숨은 늘 ‘한뼘’ 정도에 머물렀다. 걷고 계단을 오르는 일조차 버거워졌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한뼘짜리 숨을 쥐어짜더라도 계속 무대에 서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공연 전 기관지 확장 링거를 맞고, 식은땀을 흘리며 피리를 불던 고통스러운 날들이 몇 년간 이어졌다. 병원에선 당장 입원하지 않으면 급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오랜 천식으로 인한 저산소증은 부교감신경 교란, 심부전증, 장기 기능 약화와 면역 저하까지 불러왔다. 입원은 보름으로 길어졌다. 하루에도 수차례 피를 뽑고 링거 줄에 의지한 병원 생활에서 읽었던 책이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이었다.

16세기 오스만 제국, 전통을 지키려는 세밀화가들과 새로운 화풍 사이에서 갈등하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묘한 동질감을 주었다. 소설 속 화가들은 자신이 평생 믿어온 예술의 질서와 아름다움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스스로 눈을 멀게 하는 선택까지 감내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지키려 한다. 그 처절한 고뇌와 집념은 이상하리만큼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보름간의 집중 치료를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섰을 때,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계단을 오른다는 것이 눈물겹게 고마웠다. 다시 찾은 귀한 숨으로 한국 문화와 한국 음악 대학 강의를 재개했고, 지난 2월 미국 학회에 선정되어 단독 세션과 리사이틀을 마치고 돌아왔다. 현지 클래식 음악가들과 교감은 피리 소리가 가진 보편적인 울림과 세계적인 가능성을 확신하게 했고, 내가 연주자로서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다시금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숨 막히던 시간 속에서 다시 숨 쉬고 다시 악기를 잡아야 할 이유를 조용히 일깨워준 고마운 책이다.

김지윤 소리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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