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안 냈지만 부산은 오래된 차의 도시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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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래헌 제54회 경주남산춘계헌다식 동행 취재
60년대 ‘부산 차회’ 전통 80년대 대학가서 전국 파급
신라 다도 흔적 남은 남산서 헌다·헌향 차 원류 탐구
‘커피 도시 부산’ 앞서 ‘차 문화 중흥지’ 전통 되살려야

얼마 전 차를 좋아하는 지인으로부터 경주 남산에서 열리는 헌다식(獻茶式)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헌다식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1985년에 시작해 40년을 이어왔다는 이야기가 솔깃했다. 마침 다가오는 5월 25일이 ‘차(茶)의 날’이어서 차에 대해 알아두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서차문화연구소 주최로 경주 남산 삼릉 및 용장사지에서 열린 제54회 경주남산춘계헌다식에 동행했다. ‘차 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열린 차 문화 기행이었다.


동서차문화연구소 서재홍 소장이 농차를 정성스럽게 개고 있다. 동서차문화연구소 서재홍 소장이 농차를 정성스럽게 개고 있다.

■차 문화 중흥 이끈 ‘부산 차회’

지난달 25일 부산 중구 중앙동의 전통찻집 다래헌에 모여 경주 남산을 향해 출발했다. 일행은 모두 11명이었다. 다래헌 서재홍 대표가 함께 운영하는 동서차문화연구소 회원이나 단골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서 소장은 1989년에 결성된 부산차인연합회 초대 사무국장을 역임해 부산의 차 문화에 정통했다. 경주 남산으로 가면서 부산 차 문화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됐다.

서 소장은 “1988년에 다래헌을 열었다. 설록원과 소화방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전통찻집이 부산에 유행처럼 번질 때였다. 1991년 부산에는 전통찻집이 70여 곳에 달했고, 대학 차회까지 합쳐 50개가 넘는 차 모임은 서울과 전국을 다 합쳐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대단한 숫자였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1980년대 부산에서 차 문화가 꽃을 피운 것은 1960년대에 ‘부산 차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듣는 ‘부산 차회’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에게 차를 올리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에게 차를 올리고 있다.

1961년 5월. 5·16 군사 정변 직후라 모든 게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의재 허백련은 무등산 차밭에서 일군 춘설차를 행낭에 넣고 경남 사천의 다솔사로 향했다. 허백련은 남도 화단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광주에서 차 문화를 꽃피운 인물이었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허백련을 만나 차를 마신 일이 종교의식처럼 아름다웠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다솔사에는 현대 한국 차의 중흥조로 불리며 부산대 설립에 크게 기여한 효당 최범술 스님이 있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마산의 시조 시인 노산 이은상을 만난 뒤 함께 부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동아대 교수로 있던 백아 양지환의 서구 동대신동 낡은 기와집에 짐을 풀었다. 양지환은 전답을 팔아 독립 자금을 댔고, 1980년대에는 부산 대학가 차 문화 확산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석조여래좌상에게 헌다례를 올리고 있다. 석조여래좌상에게 헌다례를 올리고 있다.

다음날부터 양 교수의 집에는 서예가 청남 오제봉, 향파 이주홍, 요산 김정한, 먼구름 한형석, 부산일보 최세경 사장, 고려민예사 최규용 대표, 재부호남향우회 오재균 회장, 범부 김정설, 초정 김상옥, 신정희 도예가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이은상의 즉흥 시창, 이주홍의 해학과 골계, 남도 소리가 곁들여진 차회가 사흘 동안 열렸다. 이 같은 ‘부산 차회’가 1961년부터 65년까지 5년간 이어졌으니, 지역에 끼친 문화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80년대 동아대를 시작으로 부산대, 경성대, 부경대(부산수산대) 등 부산 지역 대학에도 차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서 소장은 “60여 년 전, 혁명 정국의 긴장 속에서 열린 부산 차회로 인해 80년대 부산에서 차 문화가 발흥했고, 그 뒤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2000년대 한국 차 문화의 중흥으로 이어졌다. 모든 영역에서 서울로 집중되며 지방은 변방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부산 차회’는 부산 차인들의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라고 말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에게 차를 올렸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에게 차를 올렸다.

■남산에서 다례를 여는 이유는

‘차의 날’이 되면 차 자생지인 부산 금정산 차밭골, 차의 최초 재배지로 알려진 경남 하동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헌다례(獻茶禮)가 열린다. 현충일이나 삼일절 같은 국가적인 추모일에도 마찬가지다. 불교 국가였던 고려 시대에는 차 문화가 발달했다. 조상에게 제사를 뜻하는 차례(茶禮)도 원래는 술 대신 차를 올리는 간소한 예절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이름 붙여졌다. 조선 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가 자리 잡으며 차 대신 술을 올리는 문화가 확산된 것이다.

일행 중 한 사람으로부터 마침 궁금했던 “왜 경주 남산에 가서 헌다례를 지내느냐”라는 질문이 나왔다. 경주 남산 하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경덕왕 시대의 충담 스님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에 실린 향가 ‘찬기파랑가’를 지은 분이다. 스님은 매년 음력 3월 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 두 차례 경주 남산 삼화령 미륵 세존에게 차를 달여 올렸다. 경덕왕이 남산 나들이를 하러 갔다 길에서 스님을 만나 차를 맛본 뒤 받은 노래가 ‘안민가(安民歌)’라고 한다. 지금도 경주에서는 매년 삼짇날과 중양절에 충담재를 열어 차를 올리고 있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당시 차 문화의 전통을 집대성했다고 할 정도로 차를 올리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머리를 잃은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에게 헌다례를 올렸다. 머리를 잃은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에게 헌다례를 올렸다.

경주 남산과 관련해 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매월당 김시습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해 전국을 방랑하던 김시습은 7년간 남산 용장골에 머무르며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남겼다. 당시 남산의 이름이 금오산이었다. 김시습은 한국 차 문화 역사에서 ‘초암차(草庵茶)’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소박한 차를 의미하는 초암차가 일본의 ‘와비차’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진다. 지금도 ‘초암차 보존회’는 남산 용장골을 오가며 김시습의 초암차에 관한 흔적을 찾아서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서 소장은 “신라 시대 귀족들은 불국사 같은 절에 다녔지만, 민중들은 남산으로 올라와 불상을 조성하고 염불하면서 전쟁으로 희생된 가족들의 혼을 달랬다. 지금도 남산에는 민중들이 만들었던 불상만 남아 있다. 경주 남산에는 불교나 차 문화와 관련한 엄청난 콘텐츠가 묻혀 있다”라고 설명했다.


■신라의 차 문화를 만나다

남산 기행은 ‘삼불사 배리 삼존 석불’ 다례로 시작됐다.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신라 미소’의 절정을 보여주는 석불에게 참배하고 삼릉계곡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선각육존불은 두 개의 큰 바위에 여섯 구의 불상과 보살상을 선으로 조각한 마애불이다. 특히 왼쪽 바위에 새겨진 아미타여래를 향해 양옆의 두 협시보살이 무릎을 꿇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앞에서 ‘AI 시대와 문사철(文史哲)’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열리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앞에서 ‘AI 시대와 문사철(文史哲)’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열리고 있다.

두 보살이 가슴 높이로 받쳐 들고 있는 꽃 쟁반 같은 기물을 다기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당시 통일신라 시대에는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헌다 의식이 성행했고, 이 조각은 당시의 다도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근거라는 것이다. 불상 바로 앞 평평한 바위는 차를 끓여 올리던 공양 제단으로 추정된다. 동서차문화연구소 회원들은 이곳에서 헌향, 헌화하고 준비한 농차로 헌다례를 가졌다. 처음 맛본 푸른 농차는 진하지만 감미로웠다.

그 뒤 남산 신라의 석불 앞에서 ‘AI 시대와 문사철(文史哲)’이라는 주제의 특강이 열렸다. 동아대 석당학술원 전주희 교수는 “AI 시대를 맞이했지만 인류는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내가 먹고 마시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누구를 통해서 오는지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신라 불국토의 시공간을 상상하며 접할 수 있게 한 ‘문사철’에 감사한다”라고 마무리했다. 신라를 느끼며 듣는 야외 특강이 인상적이었다.


포석곡 바위에 직사각형으로 파낸 벽장 모양이 일본 ‘도코노마’의 원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포석곡 바위에 직사각형으로 파낸 벽장 모양이 일본 ‘도코노마’의 원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포석곡 바위에 직사각형으로 파낸 벽장 모양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차실의 상징인 ‘도코노마’의 원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설도 흥미로웠다. 울산 염포 왜관에 있던 일본 승려가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던 김시습을 찾아와 다도를 배웠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하산길에는 머리를 잃은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앞에 헌다례를 올린 뒤 서 소장이 금강경을 외웠다. 용장사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남산에서 가장 큰 절로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라고 했다. 김시습은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차를 마시고 있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헌다한 뒤 금강경을 외우고 있다.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헌다한 뒤 금강경을 외우고 있다.

■부산은 차의 도시

돌이켜 보니 차와 부산의 인연이 매우 깊고 오래되었다. 차와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야의 건국시조 수로왕을 기리는 제사에서 차를 올렸다는 내용이다.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차 씨앗을 가져왔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스님들이 차를 즐겼고, 일본과도 가까우니 부산은 일찍부터 차 문화가 발달할 여건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날 참가자 중 ‘busan_tea_spirit’이라는 SNS를 운용하는 혜광고 김성일 교사는 “커피 도시 부산 이전에 부산은 한국 차 문화의 중흥지였다. ‘차의 도시 부산’이라는 화두를 먼저 던지고 나머지 조각들을 채워나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일본 말차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현상이 우리 차가 나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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