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행복은 우리를 초기화한다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반복해 경험하면 처음 만족감 줄어
변한 건 없지만 인간 기준 높아져
초심 찾으면 작은 것도 기쁨 얻어
어릴 적 단팥죽을 무척 먹고 싶어 했다. 그 시절 팥은 귀한 것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부엌장 깊숙이 숨겨둔 팥을 찾아내어 혼자 단팥죽을 끓여 먹다가 된통 혼이 났다. 그때 처음 맛본, 뜨겁고 달콤한 단팥죽이 어찌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어른이 되어도 가끔 단팥죽을 먹지만, 그때의 맛은 다시 느낄 수 없다. 그 맛의 절반은 팥에서 왔지만, 절반은 ‘처음’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숟가락부터 달콤함이 조금씩 옅어지듯, 변한 것은 팥도 단팥죽도 아니었다. 변한 것은 오직 나의 기준선이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라 부른다. 같은 것을 반복해서 경험할수록 처음의 만족감은 줄어든다. 첫 월급의 감격이 몇 달 후 당연해지고, 오랫동안 갖고 싶던 물건을 손에 넣은 기쁨이 이내 시들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처음과 같은 감흥이 오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도 비슷한 설명이 있다. 앨런 파르두치의 범위 빈도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자극을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비교 속에서 판단한다. 강렬한 경험은 곧 기준이 되고, 그보다 약한 것들은 작아 보인다. 브릭먼과 캠벨이 말한 ‘쾌락의 쳇바퀴’도 같은 맥락이다. 인간은 높아진 기준에 금세 익숙해지고, 일상의 기쁨은 희미해진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이후 일상에서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행복은 내가 가진 것의 크기가 아니라, 경험과의 비교 속에서 결정된다. 그래서 충분히 좋은 순간도 더 강한 경험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우리는 이 단순한 사실을 자주 놓친다.
나는 이것을 책이 아니라 교실에서 배웠다. 20여 년 전, 현대문학을 가르치던 시절의 일이다. 학생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고 토론하는 수업이었는데, 그해만큼은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빈자리가 없었고, 수업 종료 시각이 지났을 때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다. 서로의 해석이 존중되고 새로운 의미가 피어오르는 교실이었다.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해 최우수 강의 교수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다.
이듬해 수업은 출석을 부르지 않자, 빈자리가 점점 늘었고, 작품을 읽어오지 않은 학생들이 생기며 토론의 흐름이 자주 끊겼다. 나는 조바심이 났고, 수업을 마칠 때마다 실망을 안고 교실을 나왔다. 그러나 문제는 학생들에게만 있지 않았다. 절정의 수업이 하나의 기준이 된 뒤로, 나는 그보다 낮은 순간들을 결핍으로만 읽고 있었다. 내가 시계를 보는 만큼 학생들도 나를 따라 시계를 보았다. 깨달음은 뜻밖의 곳에서 왔다. 어느 날 복도에서 동료 교수가 학생들이 내 현대문학 수업을 정말 좋아한다며, 부러움을 전했다. 분명 올해 수업에도 빛나는 해석이 있었고 진지한 눈빛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최우수 강의 교수라는 성취의 그림자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순간들을 놓치고 있었다.
결국 내 기준선은 높아진 채로 머물러 있었고, 그만큼 현재의 기쁨은 희미해져 있었다. 서은국은 〈행복의 기원〉에서 말한다. 쾌락은 생존을 위해 설계된 경험이며, 그것이 제 기능을 하려면 본래 값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진화는 우리에게 항구적인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찬란한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기준선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그래야 다시 작은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행복은 높은 곳에 저장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초기화는 포기가 아니라, 다시 처음의 감각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혼자 몰래 끓여 먹던 그 단팥죽을, 이제는 아내와 손을 잡고 동네 시장에 가서 함께 먹는다. 늘 처음처럼은 아니지만, 그렇게 먹으려 천천히 음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