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성의 개념 쌓기] '재능충'이란 자기합리화에 대한 경계
부산대 철학과 강사
재능충 규정, 자신 정당화하는 자기변호
누구나 서로 다른 종류·수준 재능 가져
반복되는 재능 타령은 자신 가두는 것
청년들의 세계에서 ‘재능충’이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이는 타고난 재능을 지닌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전통적인 예체능 분야를 넘어 공부, 상업, 연애, 게임, 심지어 노력 자체까지도 재능의 영역으로 보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 타고난 뇌 구조나 도파민 체계를 근거로 ‘노력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재능’이라는 설명이 덧붙는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다. 이와 함께 재능충은 ‘노력충’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이기도 한다. 노력충은 노력했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한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그 어감 자체에 조롱의 뉘앙스가 있다. 반면 재능충은 적은 노력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내는 사람을 향한 부러움과 선망이 담긴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재능충은 비하적 의미가 상대적으로 옅기 때문에 SNS를 넘어 공중파 방송에서도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고 재능충이라는 말에 비웃음의 뉘앙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재능충의 성취를 노력의 결과가 아닌 타고난 재능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태도를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그들이 이룬 성과를 ‘운 좋게 타고난 재능 덕분’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선 속에서 재능충은 자신과 달리 재능을 갖지 못한, 아무리 애써도 결국 노력충의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이들을 기만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만약 재능 있는 사람이 자신을 평범하다고 말한다면 그 평범함에조차 도달하지 못한 자신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될까. 이는 곧 평범함마저도 버거운 열등한 존재가 돼버린다. 따라서 누군가를 재능충으로 규정하는 행위는 타인을 평가절하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자기변호에 가깝다. 다시 말해 타인을 끌어내려야만 유지되는 불안정한 자존심을 지키려는 방편인 셈이다.
물론 재능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를테면 수영에서는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부력이 중요한데, 인간의 신체 구조상 하체는 상체보다 부력을 덜 받는다. 이 때문에 하체가 짧을수록 유리하며, 다리가 짧으면 물을 밀어낼 때의 힘 손실도 줄어든다. 즉 수영선수에게 상·하체 비율은 체력 안배와 직결되는 요소다. 이러한 점에서 키 195cm에 비해 다리 길이가 81cm에 불과한 수영선수 마이클 펠프스의 신체 조건은 수영에 유리한 요소만을 갖춘 압도적인 재능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그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23개를 획득한 전설적인 성과 역시 재능을 배제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런 사례는 다른 분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필즈상 수상자들의 수학적 직관이나, e-스포츠 게이머의 뛰어난 동체시력 역시 명백히 재능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묻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지 못하면 모두 노력충에 불과한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지 못하면 실패한 영화감독이라 할 수 있는가. 이는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터무니없는 잣대다. 누구나 서로 다른 종류와 수준의 재능을 타고난다는 사실로부터 그 재능을 반드시 정상에 이르기 위해 써야 한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음악을 한다고 해서 세 살에 작곡을 시작하고 여섯 살 전에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연주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될 필요는 없다. 삼각 함수를 이해하기 위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끌어올 필요도 없고, 어깨 근력을 기르겠다고 운동하면서 아놀드 슈왈제네거를 떠올리며 낙담할 이유도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체능이든 학문이든 기본적인 이해와 성장을 이루는 일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사소한 경쟁에서의 미미한 우위가 개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꿔주지도 않는다.
물론 정상만 바라보는 이러한 세태를 단지 개인의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1등 외에는 병풍처럼 취급해 버리는 사회 분위기, 과도한 경쟁 압박 등 외부 요인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재능충 운운하는 주체는 이를 통해 결정론적 무결함을 즐기기도 한다. 자신을 ‘재능 없는 피해자’ 위치에 고정하는 순간, 다시 말해 피해자 서사를 내면화하는 순간, 자기 책임성으로부터 벗어나는 듯한 뒤틀린 안도감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만 속에서 흘려보낸 젊음과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반복되는 재능 타령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굳어지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은 새겨들을 가치가 있다. “우리의 허영심과 자기애가 천재 예찬을 부추긴다. 왜냐하면 천재를 한낱 기적으로서 우리와는 아주 먼 존재라고 생각할 때만 천재가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