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젠더의 천륜
김대현 연세대학교 글로벌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일본 야스쿠니 신사 참배의 문제는, 첫째로 전쟁을 일으킨 가해자와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가 거기에 함께 합사된 것이고, 둘째는 그 모두를 함께 추모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마땅한 일이며, 거기에 가해와 피해를 따지는 일이 덜 인간답다는 인식이 그로 인해 유포되는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는 전쟁의 피해와 가해를 엄정하게 따지는 일이 마치, 사람이면 마땅히 기리고 애도해야 할 추도를 하지 말자는 냉혈한의 입장으로 보이게 된다.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추모도 마찬가지다. 어떤 성폭력 가해자가 유명을 달리했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추도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으레 따라붙는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그 죽음은 피해자에 대한 최종적인 가해에 가깝기 때문에 가해자를 공적으로 추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럴 때 마주하는 목소리 중 하나는,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추모는 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젠더 외치는 사람들은 어쩜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느냐는 반응이다.
‘피도 눈물도 없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성폭력 가해자 공개 추도를 반대하는 것은, 그걸 말하는 사람에게 피도 눈물도 없기 때문이 아니다. 삶과 죽음의 값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부디 공평히 배분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추모를 강조하는 사람이, 그 사건 피해자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 추모에 그만큼 관심을 갖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온갖 사회적 지탄을 감당할 가해자가 앞으로 대체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며 가해자에 대한 인간적 연민을 강조하는 사람이, 그 사건 피해자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비슷한 관심을 갖는 경우도 거의 드물다. 핵심은 가해자의 삶과 죽음을 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삶과 죽음을 그보다 조금 더 많이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모든 사람의 삶과 죽음이 이미 같은 값을 가졌다고 믿고는, 자기와 좀더 친하거나 아무리 봐도 힘세 보이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먼저 감정이입한다. 그렇게 자유주의적으로 구성된 연결망이 피해와 가해를 따지는 일을 만나 한번 깨어지면, 그 사람은 그걸 따지려는 상대가 마치 천륜을 깬 것만 같은 강렬한 거부감을 느낀다. 그러나 젠더를 외치는 사람이 내가 알던 천륜을 깬 것 같은 이유는, 같은 하늘 아래 내가 짐작하지 못한 곳에서 그 천륜을 마땅히 함께 누려야 했을 다른 사람을 마주하기 위해서다.
세상에는 놀랍게도 내가 믿어온 추모와 슬픔의 항아리가 깨지는 편이 정의로울 때가 있다. 내 천륜만이 천륜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과 죽음이 마침내 같은 값을 지니기 위한 길은 그처럼 멀고 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