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이것이 왜 산업재해가 아닌가
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지난 2월, 경찰행정학을 공부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던 19세 여성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하던 직장에서 고용주인 40대 남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겪고, 즉시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범행 전후 CCTV에서 피해자가 웃고 대화하고 보행하는 모습이 확인된다는 점, 가해자가 ‘합의한 관계였다’고 진술했다는 점과 주변 진술을 근거로 피해자가 항거 불능 상태가 아니었다며 가해자에 대하여 무혐의 불송치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이 이뤄진 지 3일 만에, 피해자는 “(성관계) 동의 의사를 보인 적이 없으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피해자의 죽음으로 사건이 공론화하는 일이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이 참담하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는 최선을 다해 용기를 냈고, 적극적으로 국가에 구조 신호를 보냈다는 점이다. 피해자의 유언이나 다름 없었던 이의신청에 따라 재수사가 이루어졌지만, 경찰은 수사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반복했다. 이에 지역 시민단체가 모여 꾸린 공대위에서는 기자회견을 열어 “수사 시스템은 40대 사장과 10대 알바생의 권력 격차를 완전히 무시했다“며 ”청소년이라는 사회적 약자, 노동자라는 경제적 약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공권력의 사법적 사살”이라고 분노했다. 공대위의 이와 같은 지적은 이 사건이 형사사법 시스템과 노동 보호 시스템이 동시에 실패한 사건이라는 점을 짚고 있다.
고용주가 성폭행한 10대 알바생
사법과 노동 보호 시스템 실패에
항의유서 남기고 스스로 삶 마감
단시간 노동자 인권 침해 사안이
남녀 관계 문제로 돌변했던 현실
산업재해 본질 되묻게 하는 죽음
먼저 형사사법의 실패부터 보자.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명서를 통해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사건 정황을 기억하고 구체적으로 진술하면 심신 상실과 항거 불능이 아니었다고 하고, 반대로 기억하지 못하면 진술이 부족하다며 범죄 성립을 부정하는 수사기관의 전형성을 비판한다. 고용주와 단시간 노동자 간의 권력 관계를 이용한 가해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는 수사라는 것이다. 경찰이 아직도 현행 강간죄와 준강간죄의 구성요건에 갇혀 사건의 실체를 규명하지 못한다면 비동의 강간죄 도입이라는 입법적 해결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보다 앞서 강간죄를 ‘부동의 성교죄’로 바꾼 일본 역시 4건의 성폭력 무죄 판결로 뒤떨어진 성인지 감수성을 드러낸 사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촉매가 되어 입법 활동을 이끌었다. 일본의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해자의 ‘합의’ 주장은 근거도 없이 수용하면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는 고려조차 하지 않는 수사 관행은 국민 눈높이와도 맞지 않는 뒤떨어진 인식으로 분노만 자아낼 뿐이다.
노동 보호의 실패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무원 사이에는 간이며 쓸개를 집에 걸어두고 출근해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비단 공무원 사회뿐만이 아니다. 직장생활에서 마음속 진의와 상관없는 사회적 미소를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짓도록 요구받는다. 거기다 직장에서 갖는 회식 자리는 엄연히 업무의 연속이다. 경찰은 CCTV 속 피해자의 미소를 성관계 합의의 증거로 읽었지만, 그것은 업무의 연장선인 회식 자리에서 10대 아르바이트생이 40대 고용주 앞에서 지어야 했던 노동 현장의 언어였다. 그러나 수사 시스템은 그 권력 관계를 사적인 남녀 간의 문제로 환원해버렸다.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망자가 1명 이상 발생한 재해는 중대재해에 해당한다. 이 사건은 단시간 노동자로서 직장에서 가장 악질적인 형태의 직장 내 괴롭힘 혹은 성희롱 피해로 인권을 침해받은 사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노동자의 인권 침해를 막아서고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근로기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산업안전보건법은 이 사건에서 전혀 작동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 사건을 통해 단시간 노동자가 인권을 침해받고 안전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책임을 느끼고 뼈아픈 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던 김지은 씨는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전부인 ‘노동자 김지은’으로서의 삶을 걸고 미투를 해야만 했다. 그 분야에서 쌓아온 저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갑의 위치에 선 고용주의 성폭력은 노동자의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단시간 노동자가 고용주의 갑질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는 충격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가해자를 처벌하고 일상을 회복하고자 했으나 수사기관은 사적인 남녀 관계의 문제로 사안을 보았음은 물론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비동의 강간죄가 부재하고, 근로기준법과 고용평등법이 침묵하고, 경찰이 성인지 감수성을 망각한 바로 그 사각지대에서 한 10대 청년 여성 단시간 노동자가 죽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산업재해 혹은 중대재해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