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보이지 않는 폭력이 보이는 순간 - 한강의 <채식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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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 슈니먼, 미트 조이, 1964 퍼포먼스 기록사진, ⓒ Carolee Schneemann / Electronic Arts Intermix(EAI) 뉴욕 제공 카롤리 슈니먼, 미트 조이, 1964 퍼포먼스 기록사진, ⓒ Carolee Schneemann / Electronic Arts Intermix(EAI) 뉴욕 제공

평범한 아내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세계는 그녀를 ‘비정상’으로 규정한다. 마찬가지로 평범한 사회인인 남편은 그녀를 정신병자로 취급하여 이혼을 택하며, 베트남 참전용사이자 권위적인 가부장제의 대표로 묘사되는 아버지는 그녀를 폭력으로 교정하려 한다. 미셸 푸코가 말했듯, 근대 사회의 억압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유지된다. 정상의 경계에서 벗어나는 개인은 곧바로 병리의 대상으로 분류된다. 권력은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성을 만들어낸다.

정상적인 식사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은 보이지 않도록 조직된다. 우리는 고기를 먹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영혜에게 고기는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죽음으로 보이고, 가족은 더 이상 보호가 아니라 폭력의 공간으로 드러난다. 프로이트가 말한 ‘운하임리히(Unheimlich/uncanny)’, 즉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는 불안이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가족의 식사 장면에서 아버지는 영혜의 입에 고기를 억지로 밀어 넣고 거부하는 그녀의 뺨을 거세게 갈긴다. 설득은 강제로, 강제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 장면은 낯설지만 익숙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온 질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의 작품을 떠올린다. 1964년 카롤리 슈니먼의 퍼포먼스 ‘Meat Joy, 환희의 육체’이다. 신체를 예술의 재료로 사용하는 퍼포먼스 예술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사람들은 날고기와 생선, 생닭을 몸에 문지르며 뒤엉킨다. 그것은 육체의 해방이자 동시에 산 육체와 죽은 고깃덩이가 하나임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음식과 생명, 쾌락과 폭력의 경계가 무너진다. 슈니먼은 폭력을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감각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그 순간 해방과 폭력은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퍼포먼스는 쾌락을 추구하는 일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세련된 문명 뒤에 숨겨진 육체적 고통과 죽음, 그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가해지는 근원적 폭력을 직면하게 한다.

〈채식주의자〉 역시 마찬가지다. 영혜는 숨겨진 폭력을 보이게 만든다. 그래서 그녀는 위험하다.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보다 폭력을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인혜는 자신 역시 같은 질서 속에서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정말 정상인가? 〈채식주의자〉는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그 정상성을 찢어놓는다. 영혜가 위험한 이유는 폭력을 숨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폭력을 드러내는 순간, 세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폭력이 만연하고, 그 폭력에 감각이 무뎌진 세계에서 채식주의자 영혜는 우리가 보지 않기로 한 것을 끝내 보이게 한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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