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철의 사리 분별] 트럼프가 던진 숙제… 민주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논설위원
이란 겨냥해 석기시대·문명 말살 발언
집단학살 위협, 전쟁 범죄 예고로 해석
미국 기틀 설계 땐 이런 부류 예상 못해
반지성적 리더 폭주 막을 방법도 미비
미국 제도 차용한 우리도 헌법 보완 절실
한국 현실에 맞는 'K 민주주의' 숙의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행 이력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인종차별 발언이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저급함은 더 이상 특별한 놀라움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가 세계사 주역으로 등장한 지 11년째로 접어들면서 지구촌 사람들도 트럼프 발 충격에 다소 무덤덤해진 모양새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출현은 인류사적 맥락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인터넷 발달, 포퓰리즘 기승, 미국 제조업 붕괴와 양극화 심화, 중국 등 신흥 강자들의 거센 도전 등을 고려할 때 그의 등장과 지지층 급증은 어쩌면 불가피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국가와 개인 이익에 충실한 보수 리더를 원하는 경향성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트럼프주의는 뉴노멀로 자리매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간 정책은 미국 중심의 질서 회복에 방점을 두고 있다. 지지층들은 부적절한 일방적 관세 부과와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납치, 이란 전쟁과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제거, 돈로주의 표방 등에 대해 달러·AI 패권 유지, 중국 견제, 자원 안보, 영토 방어를 위한 선제적 대응이라고 평가한다. 즉, 그의 정책이 거칠고 상식에 부합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목표를 갖고 진행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절대 넘지 말아야 하는 선까지 넘나들고 있다. 인명을 대거 희생시킨 이란과의 전쟁 기간 중에도 골프를 하고 UFC 대회를 관람했다거나, 교황을 비난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상케 하는 그림을 SNS에 공유한 정도의 몰상식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전쟁과 관련해 최근 대국민 연설 등을 통해 다양한 발언과 글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석기시대’와 ‘문명 말살’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란을 겨냥해 “앞으로 2~3주 동안 그들을 극도로 강하게 타격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석기시대로 되돌려 보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그들이 장기간 석기시대로 접어들고 핵무기를 가질 수 없게 되면 우리는 떠날 것”이라고도 했다. 이어 ‘하나의 문명이 오늘 밤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런 말과 글은 이란의 인프라 등 현대 국가 기능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의미를 넘어 집단학살 위협을 가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핵심은 세계 최강 국가 리더라고 해서 무시무시한 반인륜적 협박을 반복적으로 일삼아도 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2017년 유엔총회서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한 전력도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민주주의 절차에 의거해 선출한 트럼프 대통령은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로 국제질서를 연이어 파괴하고 있지만 그를 제재할 방법조차 제대로 없다.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범죄를 예고한 것이라며 탄핵 소추안을 제출하고 직무수행 불능 결정을 위한 수정헌법 제25조 발동도 촉구하지만 현실화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발언을 계기로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 권력의 한계와 제재 방안에 대한 논란과 함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근본적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1776년 독립선언과 1787년 헌법 제정을 주도한 토머스 제퍼슨 등 당시 계몽주의 엘리트들이 예상치 못한 트럼프 대통령 같은 반지성적 지도자의 등장이 건국 이념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도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롭고 깨어있는 국민, 덕성을 갖춘 리더를 전제로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설계하고, 삼권 분립 등 견제 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양극화 때문에 이기주의에만 몰두하는 국민이 급증하는 등 지난 250년 동안 민주주의 환경 자체도 급변한 상황이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 상당수 국가들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모체인 미국의 제도를 차용하거나 이식받았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와 유사한 상황이 연쇄 발생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우리는 이미 2024년 12월 불법 비상계엄을 경험했다. 최근엔 입법 만능주의를 앞세운 여당의 사법개혁으로 삼권분립이 흔들리는 과정도 목격했다. 민주주의가 변질되고 폭주하는 지도자를 통제할 방법조차 없으면 자유와 평등, 다양성 등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 현재 청와대와 여당은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 부분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987년 체제 이후의 엄청난 사회·가치관 변화, 트럼프 대통령을 닮은 포퓰리즘적 정치 기인의 등장, 권력 남용과 전제주의로의 변질 우려 등을 염두에 둔 광범위한 헌법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실정에 맞는, 한층 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성숙한 ‘K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숙의도 이어지길 기대한다.
천영철 논설위원 cyc@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