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트럼프 시대, 욕망의 정치와 이미지의 저항
마사 로슬러, 휴식을 취하는 여성, 2004. 포토몽타주(부분 인용). 비평·교육 목적의 공정 인용.
미술은 언제부터 저항의 얼굴을 갖게 되었을까. 권력이 언어와 무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욕망을 세계의 질서로 포장하려 할 때, 미술은 늘 그 바깥에서 다른 언어를 만들어왔다.
오늘의 세계는 다시 한번 노골적인 제국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트럼프의 정치가 보여주는 것은 합의와 조율의 정치가 아니라, 힘의 과시, 거래의 논리, 그리고 지배 욕망의 공개적 표출이다. 동맹은 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압박의 대상이 되고, 국제법이 아니라 트럼프 왈(曰) 자신의 ‘도덕성’이 행위의 근거가 된다.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를 내세운 경제 제재와 군사 위협, 자원을 둘러싼 거래의 밑바탕에는 세계를 소유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의 정치가 놓여 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납치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군사적 행동에도 스스럼없이 석유 통제권이라는 욕망을 표출한다. 이는 트럼프 때문에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실제로는 제국이 자신의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오래된 충동의 반복이다.
이처럼 권력이 욕망을 숨기지 않을수록, 언어는 거칠고 단순해진다. 적과 동지, 승자와 패자, 복종과 제재라는 이분법만이 남는다. 그러나 미술은 바로 그 단순화에 저항해 왔다. 미술이 저항의 언어가 되는 것은 권력이 숨기고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버린 세계의 구도를 흔들기 위해서이다. 반제국주의 미술은 승리를 그리지 않는다. 대신 상처를 드러내고, 침묵 속으로 밀려난 존재들을 다시 호출하며, 힘의 논리가 가려버린 감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은 선동이 아니라 기억의 정치에 가깝다.
20세기 초중반, 제국주의와 전쟁이 노골화되던 시기에 미술은 결정적인 전환을 맞는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제국주의의 포악한 폭력 그 자체의 얼굴을 남겼고,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는 자본과 노동, 착취와 저항의 구조를 공공 공간에 새겼다. 미술은 언제나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서, 승자의 언어가 아니라 패자의 시선으로 세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동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저항은 일상적인 장면 속으로 스며든다. 마사 로슬러의 포토몽타주 작업에서 전쟁은 거실의 소파와 잡지, 안락한 실내 공간 속으로 침입한다. 편안히 몸을 뉜 실내의 여자와 폐허 속을 수색하는 병사들이 겹치는 이미지는 전쟁이 우리의 일상과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시각적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가 말하듯, 저항은 이제 구호의 정치가 아니라 감각의 재배치가 된다. 트럼프식 정치가 세계를 거래 가능한 숫자와 힘의 크기로 환원할수록, 로슬러의 이미지는 그 이면에 숨겨진 안락함의 공모, 욕망의 윤리적 책임, 지워진 타인의 얼굴을 다시 감각하게 만든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