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노벨상 메달 거래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1859~1952)은 〈땅의 혜택〉이란 소설로 192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르웨이를 배경으로 한 농부의 인생을 그린 이 소설에 대해 노벨위원회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칭했다. 기계 문명에 대한 비판, 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담아내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유럽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나치 사상에 심취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자국 침략을 공개적으로 옹호했고, 나아가 히틀러가 인류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939년 5월 베를린에서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와 만나고 귀국한 그는 자기가 받은 노벨상 메달을 괴벨스에게 보냈다. 함순은 정치적 목적으로 노벨상 메달을 양도했다가 후폭풍에 휩싸였던 대표적 인물로 거론된다.
반면 인도적 목적으로 노벨상 메달을 양도한 이도 있다. 202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는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다. 메달은 2022년 경매에서 1억 350만 달러(약 1520억 원)에 낙찰됐다. 이 돈은 유엔아동기금(유니세프)에 전달돼 전쟁으로 집을 잃은 우크라이나 어린이들을 위해 쓰였다. 숭고한 노벨상 메달의 가치를 빛낸 사례다.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는 지난 15일(현지시간)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노벨상 메달을 증정했다. 트럼프가 지난 3일 미군 기습 군사작전을 통해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을 체포해 축출한 데에 대한 감사 표시였다. 차기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꿈꾸는 마차도의 노벨상 메달 양도는 트럼프의 환심을 사는 데 효과를 발휘했다. 트럼프가 20일(현지시간)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베네수엘라 문제에 마차도를 참여시킬 수 있을 것”이라며 태도를 바꿨기 때문이다. 마차도의 메달 양도는 노벨상이 정치적 거래의 도구로 변질됐음을 보여준다. 함순의 사례가 오버랩되는 이유다.
지난 1년간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 구호 아래 외교·안보 현안을 아우르는 압박 수단으로 관세를 거침없이 활용해 왔다. 냉전 이후 미국이 주도해 온 자유무역 질서는 철저하게 무너졌고, 관세와 무력은 트럼프가 원하는 협상 조건을 얻어내는 지렛대로 기능했다. 트럼프는 세계의 조정자가 아닌 미국 이익을 우선하는 거래자를 자처했다. 20일 기자회견에서 7개의 전쟁을 끝낸 평화 행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자화자찬하는 모습이 새삼스러울 게 없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