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본 영화 ‘국보’를 보셨나요?
정기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일본어융합학부 교수
최근 일본 영화 ‘국보’가 국내에서 개봉되었다. 일본에서는 “국보를 보았습니까”라는 말이 인사말처럼 오갈 정도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지난해 6월 개봉 이후 6개월 만에 1200만 관객을 돌파한 일본 실사영화 최고의 흥행작이라는 점, 그리고 감독 또한 재일교포 3세인 이상일이라는 사실이 호기심을 자극해 지난해 연말 오랜만에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며칠이 지나도록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영화 ‘국보’는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반세기에 걸친 일본 현대사를 관통하며, 가부키 배우 한 인간이 온갖 난관을 넘어 ‘국보’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장대한 휴먼 드라마다. 영화 속 주인공 기쿠오의 삶과 선택은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나 자신의 인생이 투영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영화가 생생하게 느껴진 데에는 주인공 기쿠오가 활발히 활동하는 1980~1990년대가 필자가 유학하던 일본의 고도성장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도쿄와 지방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가파른 성장이 가져오는 특유의 숨 가쁜 에너지와 불안, 그리고 욕망이 영화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예술혼, 혈통과 재능, 고난과 갈등, 사랑과 우정이 뒤엉킨 희로애락의 인간사는 특정 시대의 일본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 영화가 특별하게 다가온 또 다른 이유는 오랜만에 일본 전통예술, 그것도 가부키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라는 점이다. 가부키를 주제로 한 영화가 80년 만에 개봉했다는 사실은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국보’는 일본의 문화와 예술을 피상적으로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일본인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왔는지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기쿠오가 어린 딸과 산책하다 신사에서 기도하는 장면이다. 딸이 “무엇을 빌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악마에게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으니, 일본 최고의 온나가타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라는 이 대사는 예술의 최고 경지에 오르기 위해 가족과 사랑, 인간적인 삶, 나아가 영혼까지도 내놓아야 했던 기쿠오의 삶을 집약한다. 동시에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고독과 희생을 뼈아프게 드러낸다.
‘국보’는 묻는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혈통인가, 재능인가.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그 물음은 자연스럽게 관객 각자의 삶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 얼마나 간절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영화는 결국 우리의 성공이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그리고 국보 기쿠오가 끝내 추구했던 것은 성공도, 명예도, 돈도, 관객의 환호도 아닌, 오직 무대 위에 잠시 스쳐가는 ‘그 순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왜 일본 사람들은 노, 가부키, 스모 같은 전통예술에 이토록 의미를 두는가. 그것은 전통예술이 일본인들에게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일본’을 구성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생활문화로 이어진 역사, 국가와 사회가 함께 만든 계승 시스템, 기술 그 자체를 존중하는 문화, 그리고 전통을 현재형 이야기로 재해석하는 능력이 오늘의 ‘국보’를 가능하게 했다. 이 토양 위에서 1200만 관객이라는 숫자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 영화는 결코 쉬운 작품은 아니다. 일본 문화와 가부키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 관객들이 과연 공감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든다. 그러나 일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으로,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하는 보편적 울림을 지닌 작품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엔딩 크레딧이 흐를 때 많은 관객들이 자리를 떴다. 개인적으로는 주제가를 끝까지 듣고, 마지막에 뜨는 이상일 감독의 이름까지 보고 일어나는 것이 이 영화의 진미를 온전히 누리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전통과 예술, 아름다움, 그리고 인간의 삶을 다룬 영화 ‘국보’는 그렇게 천천히 곱씹을수록 깊어지는 작품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그리고 자신의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