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1교시의 악몽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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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1교시 국어 영역부터 시작되는 대입 수능에서 수험생들은 ‘한글’로 출제만 될 뿐 이게 왜 국어 영역일까 싶은 문제들을 접하게 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수험생들은 국어 영역을 ‘1교시의 악몽’이라 부른다. 수험생들은 긴장으로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마주치는 장문의 지문과 까다로운 질문으로 인해 자신감이 급락해 다른 영역까지 망치는 일이 허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영어나 제2외국어 같은 타국어도 아닌 국어가 이렇게 수험생들에게 악몽을 안기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많은 이들은 수능 국어 영역에서 이전처럼 문학이나 문법 위주의 출제가 아니라 ‘비문학’ 출제가 도입되기 시작한 2008년을 악몽의 시작으로 꼽는다. 학교 국어 시간엔 접해 보지 못한 과학, 철학, 경제학, 법학, 코딩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길고 복잡한 독해 지문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능 시험 출제를 담당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받고 평소 독서량이 많은 수험생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라는 입장인 반면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젓는다.

그러던 것이 2018년 영어가 수능에서 절대평가로 바뀌면서 국어는 1교시의 악몽을 넘어 합격을 좌우하는 최대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킬러’를 표방한 문제는 더욱 어려워졌고 급기야 2023년도 수능에서는 오답률이 85%에 육박하는 역대 최고난도 문제가 출제돼 논란을 빚기도 했다. ‘클라이버 법칙’을 통해 농게 집게발 길이를 추정하는 내용의 그 문제를 놓고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국어 시험인지 과학 시험인지 모르겠다’며 치를 떨기도 했다.

올해 대입 수능에서도 국어는 당락의 최대 변수가 되고 있다. 이번 수능 국어의 예상 최고 표준점수는 146점. 역대 최고였던 2019학년도의 150점에 육박할 정도로 난도 높은 문제가 출제됐다는 뜻이다. 킬러 문항이 배제됐다고 하지만 포스텍 철학과 교수가 칸트 철학 관련 이번 수능 국어 17번 문제의 답이 없다고 할 정도로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국어 영역의 문제 지문이 EBS 교재와 상당 부분 연계된다며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동일 지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재 속 개념을 변형하거나 재구성하는 것이어서 수험생들이 국어 영역 간판 아래 다른 학문 분야의 개념과 내용을 공부해야 하는 부담은 여전하다. 영역 이름에 걸맞지 않은 평가를 치러야 하는 수험생들이 너무나 안쓰럽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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