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왜 백범 김구를 소환했나?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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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중략) 이 일을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사상과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건립과 국민교육의 완비다.” 백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 속 ‘나의 소원’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일제의 폭압, 해방의 혼란 속에서도 나라의 미래를 ‘문화’에서 찾았다. 물질이 아닌 정신, 총칼이 아닌 품격이 나라의 힘이 된다고 믿었다.

지난달 31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 고대 실크로드의 도시에서 한 이름이 거명됐다. 바로 백범 김구다. 이날 유네스코는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의 해’로 공식 지정했다. 유네스코 기념의 해는 50주기나 100주기 등 특정 주기를 맞은 인물이나 유산 가운데, 인류의 가치에 기여한 대상을 선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앞서 다산 정약용(2012년, 탄생 250주년)과 김대건 신부(2021년, 탄생 200주년)가 선정된 바 있다. 1994년 서울 수도 지정 600주년, 1996년 한글 창제 및 반포 550주년, 2013년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포함하면 대한민국 유산이나 인물이 지정된 것은 이번이 여섯 번째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성취를 넘어, 한국 문화의 깊이와 사상적 유산이 인류 보편의 가치로 자리매김했음을 뜻한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긴다. 유네스코는 왜 21세기인 지금, 이미 세상을 떠난 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다시 불러냈을까? 그 이유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달 31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의 해’로 공식 지정했다.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 모습. 부산일보DB 유네스코는 지난달 31일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총회에서 그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2026년을 ‘유네스코 세계 기념의 해’로 공식 지정했다. 사진은 백범 김구 선생의 연설 모습. 부산일보DB

■그를 불러낸 이유는

유네스코는 회원국이 제안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교육·과학·문화를 통한 국가 간 협력 촉진과 평화·안보 기여라는 유네스코의 목표와 가치에 부합하는 경우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지정해 오고 있다. 유네스코의 답은 명료하다. 김구 선생의 ‘교육을 통한 문화강국 건설’과 ‘평화의 실현’에 대한 신념이 유네스코 헌장의 정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평가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며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광복 이후에는 남북통일을 위해 분단을 넘어선 협력을 호소했다. 무엇보다 교육과 예술, 인격과 교양이 나라의 힘이 된다고 믿었다. 유네스코는 그 신념을 ‘평화와 인류애, 문화의 힘을 통한 행복의 철학’으로 평가했다.

우리는 김구를 종종 독립운동가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는 혁명가이자 동시에 철학자였다. 해방 이후의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그는 이미 ‘문화의 힘’으로 제시했다. <백범일지> ‘나의 소원’은 그 사유의 정수를 담고 있다. 그에게 문화는 단지 예술이나 교양에 머물지 않았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자, 인류를 하나로 잇는 윤리였다.

그가 문화의 힘을 말하던 1940년대, 조국은 총칼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 문화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비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직시한 혁명가였다. 무력의 한계를 누구보다 깊이 체험했기에 그는 정신의 힘을 믿었다. 도덕과 예술, 인격과 교양이 어우러진 힘만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소프트파워의 선구적 개념이었다.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비전과 통찰은 21세기 K-콘텐츠의 시대를 미리 내다본 듯하다. 방탄소년단(BTS) 멤버 RM이 자주 언급하는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도 바로 김구 선생의 말이다. 2024년 작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가장 많이 회자된 말 또한 백범의 ‘문화의 힘’이었다. 그의 사상이 세대를 건너 젊은 언어로 다시 숨 쉬는 순간이었다.

종종 우리는 GDP, 수출액, 국방비, AI 경쟁력으로 국가의 위상을 재단한다. 하지만 김구는 그와는 다른 좌표를 제시했다. 그가 꿈꾼 문화 강국은 힘의 논리를 넘어 인류의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현실의 냉혹함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는 끝내 문화의 힘을 믿었다. 무력은 한 시대를 지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화는 세대를 이끈다고 보았다. 그의 사유는 제국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였지만, 바로 그 점에서 가장 혁명적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말했던 그 철학이 지금 유네스코를 통해 다시 호명된 이유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 . 부산일보DB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 . 부산일보DB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김구가 꿈꾼 나라

21세기 세계는 ‘힘의 논리’에 의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전장, 가속화되는 군비 경쟁, 디지털 패권 다툼, 그리고 인공지능이 불러온 인간성의 위기까지. 혐오와 분열의 언어가 SNS를 떠돌고 기술의 진보가 오히려 마음의 거리를 넓히고 있다. 전쟁은 멈추지 않고 군비는 늘어만 간다. 디지털 권력은 인류의 사유를 지배하고 혐오와 차별은 네트워크 속을 떠돈다. 유네스코가 2026년 세계 기념의 해로 김구 선생을 선정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자, 인류에게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다. 문명은 눈부시게 진보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그만큼 평화롭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은 영화, 음악, 드라마, 게임, 패션, 음식까지 문화의 모든 장르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K-팝이 세계인의 지구 반대편 젊은이들을 춤추게 하고,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영화 <기생충>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이야기와 감정으로 세계를 사로잡았다. 이는 김구가 말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아름다움은 부나 권력이 아니라, 타인을 감동시키는 문화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백범의 비전이 K-컬처의 현실로 잇닿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뿌듯한 자부심을 준다. 실제 문화가 국가 브랜드가 되고 외교 언어가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됐음을 우리는 최근 경주 APEC(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을 통해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구가 말한 문화 강국은 오늘의 ‘K-콘텐츠 강국’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문화의 가치를 숫자나 시장의 논리로 측정하지 않았다. 문화의 진정한 힘은 얼마나 많은 팬을 모았느냐가 아니라, 그 문화가 사람의 삶을 바꾸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게 만들었는가에 달려 있다. 백범이 말한 아름다움은 ‘세계에서 가장 잘 팔리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나라’였다. 그의 문화관은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감동의 윤리였다. 문화의 힘은 배타적 우월감이 아니라 공감과 화해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김구가 말한 ‘문화의 힘’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K-콘텐츠는 세계를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자본의 논리 속에서 피로를 낳고 있지는 않은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번쯤 되돌아봐야 한다. 백범은 문화의 품격을 강조했다. 단지 ‘보여주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힘’. 유네스코가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른 것은 바로 이 본질을 우리에게 되묻기 위해서일 것이다.


가수 지드래곤이 지난달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지드래곤이 지난달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가 가야 할 길

유네스코의 이번 결정은 우리 사회가 성장의 다음 단계를 고민해야 함을 일깨운다. 경제력과 기술력으로 국격을 세운 시대를 지나, 이제는 ‘문화의 품격’이 국가의 품위를 결정한다. AI(인공지능)가 글을 쓰고, 데이터가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일수록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힘, 타인을 이해하고 세계를 공감시키는 예술과 교육의 가치가 더욱 소중해진다.

김구가 말한 ‘문화강국’은 영화나 음악의 흥행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존중, 다양성의 포용, 평화를 향한 상상력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를 의미했다. 유네스코가 김구를 ‘세계의 기념 인물’로 선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년은 김구 탄생 150주년이다. 기념 행사보다 중요한 것은 그 정신을 오늘의 언어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 말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의 문화는 단지 소비되는가, 아니면 세상을 바꾸는가. 우리가 문화의 힘을 말할 때, 그 중심에 사람과 존중, 평화가 있는가.

백범 김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사상가였고, 독립운동가이면서 동시에 인문주의자였다. 그가 바란 ‘아름다운 나라’는 총칼로 지킬 수 없고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나라였다. 오직 사람의 마음과 문화의 품격으로 완성되는 나라였다. 그의 말은 20세기의 독립운동 언어이면서, 동시에 21세기의 문화 비전이었다. 유네스코가 그를 다시 불러낸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문화의 힘’이 여전히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음은 지금 우리에게도 향한다. “우리는 과연, 김구가 꿈꾼 그 아름다운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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