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가은 감독 “영화는 세상을 담는 그릇 그 이상의 역할 해야”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22일 스크린 개봉 ‘세계의 주인’ 연출
‘우리들’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신작
영화에 일상 속 여러 기적 담고 싶어

윤가은 감독이 영화 ‘세계의 주인’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윤가은 감독이 영화 ‘세계의 주인’을 관객에게 선보인다.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대표성을 띠려는 욕심은 내려놨어요. 어떤 사건 자체보다, 자신의 경험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것을 말하는 아이의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영화 ‘우리들’ ‘우리집’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를 섬세하게 그려낸 윤가은 감독이 6년 만에 신작 ‘세계의 주인’으로 돌아왔다. 오는 22일 개봉하는 이 영화는 성폭력 피해 생존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20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윤 감독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니 현실에 희미하게 담긴 이야기들이 많았다”며 “사건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삶을 바라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윤 감독은 사건을 자극적으로 묘사하거나 인물에게 대표성을 부여하는 대신, 한 소녀가 상처를 안고 세상을 살아가는 과정을 묵묵히 따라간다. 시나리오 작업은 10년 넘게 준비해온 결과였다. 그는 “10대 여자아이들이 직접 부딪히며 겪는 성과 사랑, 연애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다루고 싶었다”며 “풋풋한 연애로만은 담기지 않는 공포와 폭력의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이를 작품에 담기로 했다”고 했다. 실제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선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통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이 깨졌어요. 예를 들면, 생존자분들께 ‘요즘 가장 큰 고민이 뭐예요?’라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변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통의 것들이더라고요. ‘일과 삶의 균형’ 같은 것들이요. 인터뷰를 할수록 작품 만들 힘을 얻었어요.”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세계의 주인’ 스틸컷.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윤 감독은 ‘세계의 주인’을 쓰면서 작품의 구조와 시점을 수없이 해체했다. 감독은 “초반엔 기승전결이 확실한 이야기였다면, 3~4년 동안 그걸 부수는 과정이었다”고 돌아봤다. 팬데믹 시기는 그런 그에게 위기감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동시에 전해줬단다. 그는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영화를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윤 감독은 “저는 지금까지 영화는 ‘이야기’로 생각해왔는데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며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새로움이 없으면 재미도 없다’는 마음으로 기존 그만의 1인칭 서사에서 벗어나 3인칭 구조로 도전했다. “중심 인물을 잃지 않으면서 주변 세계의 반응과 태도를 담는 게 가장 어려웠어요. 이번 작품을 같이 한 편집 감독이 제게 그러더라고요. 이번 작품을 하면서 제가 제일 많이 한 말이 ‘새로운 게 필요하다. 균열을 내고 싶다’라고요. 하하.”

영화의 중심에는 신예 서수빈이 있다. 윤 감독은 “보통의 건강한 체격이 주는 신뢰가 있었고, 상대 배우의 표현에 귀 기울이는 태도에서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큰 부담을 느꼈을 서수빈에게는 “나도 이 이야기가 힘들다, 같이 의지해서 가보자”고 다독였단다. “사실 제가 서수빈 배우에게 많이 의지했어요. 많은 장면을 같이 의논해서 만들어갔거든요. 그가 그걸 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제가 배우에게 해준 건 ‘잘하고 있으니, 너무 부담을 갖지 말라’는 말뿐이었어요.”

윤가은 감독은 영화가 현실을 단순히 비추는 매체가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영화는 현실을 담는 그릇을 넘어 그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현실을 고발한다면, 영화는 그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 가공해 한 발짝 더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끝내 밝은 쪽으로 나아간다. “현실에서는 매일 기적이 일어나지만, 뉴스는 그걸 보도하지 않잖아요. 영화는 그런 기적을 다룰 수 있는 매체면 좋겠어요.”


남유정 기자 honeybe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