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해야 뭐라도 된다" 김성주 셰프의 좌충우돌 세상 도전기
‘흑백요리사’나 ‘냉장고를 부탁해(이하 냉부)’ 같은 요리 프로그램에 빠져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셰프의 꿈을 꾸게 된다. 미쉐린 레스토랑의 스타 셰프가 되어 세계 각국의 원하는 도시를 골라 일하며 여행자처럼 사는 삶은 얼마나 근사할까. 부산의 미쉐린 레스토랑 ‘율링’ 김성주(31) 헤드셰프는 젊은 나이에 미국과 일본 등의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탄탄한 경력을 쌓은 실력파로 소문이 났다. 음식은 먹어 봐야, 사람은 만나 봐야 안다.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던 반항아, 심지어 말도 한마디 못 하면서 비행기부터 탄 대책 없는 사람일 줄은 미처 몰랐다. 지역의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라는 판단에 ‘김 셰프의 좌충우돌 세상 도전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해 소개한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나 김성주는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아이였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잡아두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른다. 그때 문득 요리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TV에서 본 기다란 모자를 쓴 요리사의 멋진 모습. 그게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요리학원에 등록하는 조건으로 ‘야자’에 빠졌다. 성과를 증명하지 않으면 다시 학교로 돌려보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금방 따 버렸다.
남자가 4년제 대학은 나와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유로 부산의 한 대학 서양조리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와보니 정작 배우고 싶었던 요리 실습 과목이 너무 적었다. 요리까지 성적을 받기 위한 공부로 변질이 됐다는 느낌이었다. 1학년을 마치고 해군 취사병으로 입대해 동해 1함대 부산함에 배치받았다. 함정 생활은 태어나 처음으로 요리에 자신감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었다.
오전 6시 아침, 11시 점심, 오후 6시 저녁과 야식까지 매일 150명의 식사를 준비하는 생활이 2년간 이어졌다. 일 욕심이 많았던 조리장 덕분에 배에서 초밥, 스파게티, 함박스테이크, 냉면 등 오만가지 요리를 했다. 혹독한 수련 결과로 칼질도 일취월장했다. 조리장이 똑같이 짠 메뉴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요리하면 밥맛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에게는 나도 몰랐던 손맛이 있었다.
정신력이 부쩍 강해져서 돌아오니 대학 생활 또한 즐거웠다. 3학년에 올라와 과 대표를 하며 선배들도 많이 알게 됐다. 파크하얏트부산에 취직한 선배의 권유로 방학 때 처음으로 호텔에서 일을 했다. 호텔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나와 다를 것 없다고 생각한 형들이 외국인과 영어로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요리사가 새삼 멋있게 느껴지고, 나도 꼭 미국에 가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까지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일찌감치 손을 놓은 영어 실력이 갑자기 늘 리 만무했다.
어느새 졸업이 다가왔다. 호텔은 겪어봤으니 미국에 가서 레스토랑을 경험하기로 마음먹었다. 요리사들을 외국에 보내주는 회사를 통해 면접을 보고 샌프란시스코의 제일 오래된 원마켓 레스토랑에서 인턴십으로 일하게 됐다. 미국 생활은 입국 과정부터 순조롭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싸간 짐을 공항 보안요원이 산산이 풀어헤쳐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
미국 입국 2주 뒤부터 출근했지만 영어를 못 해 셰프 라인에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셰프가 냄새가 나는 고기를 주면서 처음으로 일을 시켰다. 정성껏 손질해 냄새가 심한 껍데기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살만 곱게 발라 가져다줬다. 그러자 셰프가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쌍욕을 하면서 화를 내는 게 아닌가. 껍데기를 분리해서 기름으로 만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만리타향에 혼자 나와 욕까지 먹으니 서러워 눈물이 다 났다. 이게 다 영어를 못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영어를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곳을 물색했다. 다행히 레스토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대학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반이 있었다.
가장 수준이 낮은 7레벨 반에 들어갔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참으로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 모여 있었다. 매일 오전 7시부터 12시까지 꼬박 수업을 들었다. 그 뒤 오후 2시 반에 레스토랑으로 출근해서 10시까지 일하는 게 일과였다. 레스토랑에 가면 이날 배운 영어를 동료들한테 써먹었다.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 보자는 오기에 영어 실력이 팍팍 늘었다. 셰프가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오면서 레스토랑에서도 라인 앞으로 가게 됐다. 영어 실력은 일 년 만에 레벨 3까지 뛰었다(레벨 1, 2가 원어민 수준).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진짜 발악을 했던 것 같다. 그 욕쟁이 셰프는 나의 첫 요리 멘토가 되었다.
월급의 절반은 미국의 파인다이닝(최고급 식당)을 돌아다니며 먹는 데 썼다. 매번 요리에 눈을 뜨는 순간들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이런 멋있는 요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화려함 뒤에 숨은 어려움은 미처 보지 못했다. 일 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또 다른 나라를 경험해 보고 싶어졌다. 영국에 몇 번 지원했지만 비자 발급 자체가 어려워 아직은 인연이 닿지 않고 있다.
그 뒤에 들어간 곳이 요즘 ‘냉부’ 출연으로 유명해진 손종원 셰프가 운영하는 서울의 라망시크레였다. 내가 들어가기 일주일 전에는 라망시크레가 미쉐린 1스타를 받는 행운까지 뒤따랐다. 라망시크레는 한창 각광받던 무렵 들어가 파인다이닝 요리의 기본기를 많이 배운 곳이 되었다. 사실 파인다이닝은 어디나 힘은 많이 들고 남는 것은 많지 않았다. 자기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지 않은 이상 하기 힘든 사업이었다. 파인다이닝 셰프가 내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는 것도 이때 처음 느꼈다. 2년간 재밌게 일한 뒤 다음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찰나에 여행 가서 너무 좋았던 일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일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어졌다. 그 전에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일본 비자를 받고 준비를 하는 일 년 동안 요리를 쉬고 평소 관심 있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첫 번째가 저렴한 프랜차이즈 커피집에서 일하기다. 요리사가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세상에는 10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나중에 내 가게를 운영하게 되면 이 경험이 무조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커피집 근무를 마치면 정육점으로 향했다. 그동안 소나 돼지를 많이 잡아보지 못해 육류를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일 년 동안 고기를 해체하며 정육처리 기능사 필기 자격증도 땄지만, 책에도 나오지 않는 것들을 많이 알게 된 보람이 컸다.
일본에서는 가장 힘든 곳을 찾아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쏟아보자고 결심했다. 그러면 파인다이닝에 대한 미련도 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도쿄의 미쉐린 레스토랑 세잔이었다. 세잔은 셰프가 영국인이고 직원들도 영어로 소통하니, 그동안 익힌 영어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맘대로 진로를 정한 뒤 세잔과 세잔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인스타를 모조리 뒤져서 DM을 보냈다. 자기소개와 함께 ‘세잔에서 꼭 일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내용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분의 도움으로 영어 면접을 본 뒤 세잔에서 일하게 됐다. 나처럼 한국에서 무작정 연락이 와서 일하게 된 경우는 세잔이 생기고 나서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세잔이 아시아 최고 레스토랑 1위로 선정되고, 미쉐린 2스타에서 3스타로 승격되는 영광의 순간을 요리사로서 함께 했다.
일본에 살다 보니 영어뿐만아니라 일본어도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어를 독학으로 공부해 일본어 시험에도 합격했다. 일본에 히라가나 가타카나도 모르고 와서 반년 만에 일본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자 사람들은 내가 언어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세상에 무서운 게 없고, 뭐든 안 되는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연어처럼 부산으로 돌아와 뻔하지 않은 요리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애쓰고 있다. 내 앞에 펼쳐진 많은 길이 보인다. 내년 이맘때의 나는 어떨까. 5년 뒤의 내 모습도 궁금해진다. 똑같지 않은 매일매일, 그게 나의 삶인 것 같다.
PS.도전하지 않으면 내가 우물 안에 든 개구리라는 사실을 모른다. 언어? 난관에 부딪치면 나도 모르는 큰 에너지가 나온다. 어려움을 극복해 냈을 때의 성취감은 엄청나고,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여행도 좋다. 뭐든 생각이 났을 때 나가서 경험하는 게 중요하다. 파인다이닝도 셰프의 각자 스타일이 있을 뿐이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노가다’도 해보고 카페나 정육점에서 일한 경험도 있다. 꼭 요리가 아니어도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이것저것 뭐든 해보면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요리를 하고 싶다.
◆김성주 셰프 프로필
201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원마켓 레스토랑(미쉐린 1스타)
2020년 서울 라망시크레(미쉐린 1스타)
2024년 일본 도쿄 세잔(미쉐린 3스타)
2025년 부산 율링(미쉐린 셀렉티드) 헤드셰프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