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키메라의 시대, 혼종의 리듬
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소설과 음악 작품 결합 경계 넘어서
공연장을 소비 아닌 상상의 장소로
이질적 요소 아우르는 실험 필요해
처서가 지난 8월 끝자락 토요일 오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신작 〈키메라의 땅〉을 들고 부산콘서트홀 무대에 섰다. 작가 낭독은 이야기의 문을 열고, 이어진 앙상블 소리는 그 문턱을 넓혔다. 세종솔로이스츠 위촉으로 탄생한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은 미래적 상상과 인간적 감각 사이를 크게 오가며 공간을 채웠고, 변이와 생성의 정서를 먼바다에서 끌어오는 듯했다. 그것은 낭독회도, 전통적 음악극도 아닌, 문학과 음악, 텍스트와 음향이 서로에게 기대며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여는 장면이었다. 소설과 음악 작품의 제목처럼, 우리는 진정한 ‘키메라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했던 키메라는 더 이상 공포의 상징만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합성 생물학, 디지털과 아날로그, 전통과 실험, 지역과 세계가 얽혀 새로운 형상을 낳는 경계를 넘는 창조적 은유다. 경계가 흔들리는 시대에, 예술은 그 혼종성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영한다. 내레이터의 목소리 위에 기악 음악의 질감이 포개질 때, 우리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통한 시간의 결을 어루만진다. 한 장르의 독자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매체가 서로를 변형시키며 만들어내는 ‘사이’의 경험은 이번 무대가 남긴 값진 감각이었다.
피란의 역사로 시작한 항구도시 부산은 본질적으로 뒤섞이고 열린 도시였다. 서양악기인 피아노가 가장 먼저 들어온 도시인 것처럼, 항구는 외부의 시간과 경험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장치였다. 부산은 늘 낯선 것들의 경계 위에 있었고, 그 경계성 덕분에 가장 먼저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도시였다. 개방과 융합 속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창조해 온 도시, 그 흔적은 곳곳에 겹겹이 쌓여있다. 이제는 북극항로라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의 문화적 랜드마크인 공연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공연장은 단지 무대를 빌려주는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뒤섞인 정체성을 감지하고 시대의 징후를 반영하는 울림통이어야 한다.
선조들은 예악(禮樂)에서 그 길을 일찍이 말했다. 예가 몸의 경계를 세운다면, 악은 마음의 결을 맞춘다. 서로 다른 재료의 소리를 아우르는 팔음은 중용을 잃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화악(和樂)’을 가르쳤다. 그것은 곧 도시의 조화이기도 하다. 섞임은 타락이 아니라 조율의 미덕이며, 조율은 ‘듣는 법’에서 시작된다. 결국 도시는 소리를 크게 내기보다 서로의 숨결에 귀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기획한다’는 태도다. 외부 유명세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역 맥락과 시대 질문을 프로그램의 구조 속에 심는 일이다. 이번 무대처럼 세계적인 텍스트와 한국 작곡가의 신작이 한 작품의 결을 이해하고, 하나의 호흡으로 만나는 순간, 공연장은 소비의 장소에서 상상의 장소로 바뀐다. 이름을 더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정확한 음정으로 도시의 질문을 말하는 것, 명성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맥락과 목소리로 무대를 만드는 태도다. 그것이 곧 자기 기획의 핵심이다.
공연장에 울리는 박수 사이에 스며든 짧은 침묵, 로비를 지나가던 낮은 대화, 바깥 유리창을 스치던 바람과 풍경은 무대와 악보 밖의 음표가 되어 ‘뮤지킹 음악하기’를 완성한다. 새 레퍼토리나 익숙한 곡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어떻게 듣고 서로 묶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은 ‘듣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서로를 조금 덜 말하고, 한 박자만 더 기다려 주면 된다. 프로그램이 늘 화려할 필요도 없다. 한 작품을 오래 준비하고, 한 지역의 이야기를 천천히 붙잡는 시간이 쌓이면 도시의 음색도 자연스레 깊어진다. 부산콘서트홀과 곧 문을 열 오페라하우스가 그 시간을 품는 그릇이 된다면, 공연 목록의 화려함보다 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도시의 사례를 말하지만, 도시의 길은 모방이라기보다 창조적 조율에 가깝다. 해양이라는 본성, 확장되는 문화 인프라, 지역 창작자의 네트워크, 국제적 협업의 통로라는 이질적 요소들을 한 무대에서 만드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굳이 정책적 언어로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연습이 좋은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이 공간의 품격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그 과정 자체가 곧 도시의 전략이 된다. 우리는 낯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세계의 리듬부터 듣는다. 예술은 그 리듬을 미리 들려주는 언어다. 키메라의 시대를 먼저 듣는 도시만이, 그 시대를 먼저 살아볼 수 있다. 공연장을 실험실이자 공명통으로 삼아 자기 언어로 시대를 말할 때, 비로소 문화도시 부산이 된다. 이 도시에 남겨야 할 것은 ‘누가 왔다 갔다’는 화려한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는가’라는 우리만의 연대기다. 미래는 열린 마음으로 먼저 경험하는 도시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