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우리는 모두 ‘알바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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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철 국립한국해양대 항해융합학부 교수






독일어 ‘Arbeit’는 흥미로운 여정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원래 ‘고아가 해야 하는 힘든 일’을 뜻했던 이 단어는 중세 독일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을 거치며 ‘신의 소명’으로, 산업화 시대에는 ‘시민의 윤리’로 승화되었다.

전후 독일에서는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대학생들을 돕기 위해 ‘학생 아르바이트’ 제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단순한 생계 해결책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고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는 교육적 장치였다. 메이지 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Arbeit’는 ‘아르바이토’가 되어 학생들의 부업을 지칭하게 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에 ‘아르바이트’로 정착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이 단어는 독특한 변화를 겪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아르바이트’는 더 이상 학생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은 중장년층이 생계를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찾게 되면서, ‘생계형 아르바이트’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알바’라는 축약형이 급속히 확산한 것도 이때부터다.

오늘날 한국에서 알바는 모든 형태의 비정규 노동을 포괄한다. 편의점 직원부터 배달 라이더, 온라인 과외 교사, AI 데이터 라벨러까지, 정규직이 아닌 모든 일이 알바로 불린다. 2024년 기준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은 38.2%에 달한다. 이는 독일(12-13%)의 3배에 이르는 수치다.

특히 주목할 점은 세대별로 알바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 알바가 불가피한 생계 수단이라면, MZ세대에게는 경력 개발과 자아실현의 기회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의 58.2%가 “아르바이트 경험이 취업에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알바하는 사람들을 온전한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일을 해도 직원과 알바는 다르게 대우받는다. 사회보험 혜택도, 고용 안정성도, 심지어 인간적 존중마저도 차별받는다. 독일에서 Arbeit가 모든 노동을 포괄하는 중립적 개념인 것과 달리, 한국의 알바는 2차 노동시장의 불안정 고용을 지칭하는 차별적 용어가 되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인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언어는 현실을 반영하지만, 동시에 현실을 만들어낸다. 알바라는 말에 담긴 무의식적 차별과 하대는 수많은 노동자의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그들의 노동 가치를 폄하한다.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 깊은 밤 편의점을 지키는 사람, 폭염과 한파 속에서 음식을 배달하는 사람 등 이들 없이 우리의 일상은 가능할까? 그들은 단순히 ‘알바생’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필수 노동자들이다.

더 나아가 4차 산업혁명 시대, 평생직장이 사라진 지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경계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오늘의 정규직이 내일의 프리랜서가 되고, 은퇴한 임원이 카페에서 일하는 시대다. 우리는 모두 언제든 알바생이 될 수 있고,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알바생이 아닐까?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에서 각자의 파트를 담당하고 있다.

독일어 Arbeit의 원래 의미가 ‘고아의 힘든 노동’이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홀로 던져진 존재로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알바와 정규직을 나누는 경계는 얼마나 허구적인가?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각자의 삶의 책무를 다하는 알바생이다. 그 일이 대기업 임원이든, 편의점 야간 근무든, 플랫폼 배달이든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일의 형태가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존엄성이다. 모든 노동은 신성하고, 모든 노동자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알바라는 말에 담긴 차별의 시선을 거두고, 서로의 노동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진정한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ans)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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