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김수자-몸으로 수놓는 수행의 미학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수자 '바늘 여인'(1999~2001). 8채널 퍼포먼스 비디오, 6분 33초.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김수자 '바늘 여인'(1999~2001). 8채널 퍼포먼스 비디오, 6분 33초. 김수자 스튜디오 제공

한 여자가 서 있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길에서 그녀는 말없이 서 있다. 이 세상은 그녀에게 무엇인가? 마치 그녀는 면벽한 수도승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라캉은 말한다. 나는 나의 눈(시선)을 통해 대상을 보지만, 나는 사방에서 타자들에 의해 ‘응시’된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거리, 서울, 도쿄, 상파울루, 하노이, 예루살렘, 카이로, 나이로비, 멕시코시티(1999~2001 ‘바늘 여인’ 제1차 연작). 하바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보고타, 라파스, 카라카스, 카트만두, 이스탄불(2005년 이후 ‘바늘 여인’ 제2차 연작). 이 연작은 김수자가 여러 나라의 가장 번화한 거리 한복판에서 말없이 정지된 자세로 서 있는 영상으로 구성한 작품이다.

이곳은 전쟁의 흔적 또는 근대화의 불균질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도시들이다. 또한 이곳은 분단이나 이념적 충돌의 현장이다. 또는 제국주의의 흔적이 남은 도시이며, 이주와 디아스포라, 폭력, 사회적 균열이 층층이 얽힌 장소다. 김수자는 자신의 몸을 매체로 삼아 ‘바늘 여인’(A Needle Woman) 연작을 구성했다. 김수자는 직접 거리 한복판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어떤 표정이나 제스처도 없이, 군중의 흐름 속에 잠긴 채, 침묵하고 관찰하고 감각하고 또 감내한다.

김수자의 몸은 바늘이다. 그녀의 정지된 몸은 분열된 세계를 꿰매는 바늘이다. 도시의 상처, 인간의 고통, 이주의 기억, 여성의 몸, 그것을 연결하는 실존적 매개체로서 몸이다. 1957년 대구에서 태어난 김수자는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한때는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거리에서 수집한 보자기, 이불보, 헌 옷 등을 꿰매고 천으로 오브제를 감싸는 설치 작업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녀가 처음 주운 보자기는 이사 가는 사람의 삶과 무게, 여성의 수고와 침묵을 담은 천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회화를 떠나 천으로, 보자기로, 몸으로, 그리고 멈춤의 수행으로 예술의 언어를 바꾸어 나갔다. 그 순간부터 김수자의 예술은 단순한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온 몸의 기억과, 지나온 장소의 서사, 그리고 타인의 존재를 감싸는 윤리의 문제가 되었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를 시작으로, 뉴욕 MoMA, 독일 카셀 도큐멘타, 리옹 비엔날레, 구겐하임 미술관까지, 김수자는 전통적 미술의 권위보다 선불교와 같은 수행의 고요함을 택했고, 침묵하는 몸 하나로 세계를 응시했다.

그녀의 기억, 그녀가 자란 도시의 기억, 그리고 타자들의 기억, 타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기억이 서로 소통한다. 흐르는 군중 속에서 정지되어 서 있는 그녀의 몸은, 시위가 아니라 수행이며 연민이고, 존재의 감각이다. 김수자의 몸, 그녀의 바늘은 예술의 도구이자, 사회의 상처를 짚는 감각기관이다. 미술평론가·철학박사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