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은 '상품'이 아니잖아!
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
'왜 좋은 일자리는 늘 부족한가' 출간
시장 논리와 인간 존엄 사이
'삶의 의미로서의 일' 재조명
18세 소녀 로제타는 수습기간이 끝나자 공장에서 쫓겨난다. 해고 통보를 받고 반항도 해보지만 딱히 해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 중독의 어머니와 함께 이동식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는 로제타는 유일한 구원인 일자리만 기다린다. 저자는 1999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벨기에 영화 ‘로제타’를 허구와 과장의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로제타는 어디에나 있다”고 말한다.
시장의 논리와 인간의 존엄 사이에서 ‘삶의 의미로서의 일’을 재정의하는 책이 출간됐다. 국제노동기구(ILO) 고용정책국장 이상헌이 ‘일하는 삶의 경제학’이라는 시리즈를 통해 오늘날 일자리 문제의 본질을 규명한다. 숫자 너머를 보기 위해, 불화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 지금 한국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지난 30년간 국제기구, 정책 현장, 경제학 연구의 최전선에서 정책 개발과 조언을 업으로 삼아온 그가 학문적 고찰과 실천적 고민을 함께 담았다.
똑떨어지게 답이 나오는 경제학적 분석을 뛰어넘어, 노동과 고용이라는 좁은 개념 밖에 존재하는 ‘일하는 삶’의 가치를 다시 묻는다. 9장으로 구성된 책은 각각의 장에서 ‘좋은 일자리’를 둘러싼 다층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일하는 삶을 생생히 묘사하고 곳곳에서 현실적인 대안을 강구한다. 실업, 일자리의 사회적 가치, 대가 또는 임금, 최저임금, 노동시간, 기술변화, 이주노동, 정부와 기업의 역할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저자는 특히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왜 일자리는 부족한가”가 아니라, “왜 좋은 일자리는 부족한가”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적 접근을 넘어, 삶의 의미로서의 ‘일’을 사유하고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노동시장을 공급과 수요가 만나 균형을 이루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실업을 비롯한 모든 일자리 문제는 자연스럽게 조정되며 저절로 해결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노동자는 상품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의 가치는 임금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기여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노동시장이 태생적으로 불완전하며, 말끔한 시장 논리 만으로는 일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AI와 같은 디지털 혁신과 자동화가 가속화되며 어제의 새로운 기술은 금방 지루한 기술이 되버린다. 과거와 같은 안정적인 일자리 개념은 더는 굳건하지 못하다.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계약직 등 다양한 고용 형태가 확산되며 노동의 개념 또한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정책적·사회적 대응은 여전히 부족하고, 논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지적한다. 각종 경제 이론과 연구 결과, 최신 국제 사례를 바탕으로 기존 경제학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분석과 통찰을 제공한다.
영화 ‘로제타’가 나온 이후 벨기에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는 청년고용촉진법을 뜻하는 ‘로제타법’이 제정됐다. 이 책은 현실의 ‘로제타’들이 함께 모여 고민하고 더 나은 일하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단단한 디딤돌을 놓는다.
저자 이상헌은 경남 사천에서 태어났고, 부산 동구 수정동에 살면서 중·고교를 다녔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마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노동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이 1991년 ILO에 가입한 이후 한국인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상헌 지음/생각의힘/320쪽/1만 9800원.
박석호 기자 psh21@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