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션 뷰] 미국발 변화와 한국 해운조선업계 대응
김인현 고려대 명예교수·세계해양포럼 기획위원장
미국은 무역적자 해소와 해양에서의 중국 견제를 위해 자국우선주의에 기반한 조선 및 해운 분야 법·제도에 대대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미국 조선업의 부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조선소의 협력을 구한다는 점이 큰 정책 변화다. 중국의 해군력에 대응하기 위해 군함과 전략물자 수송선이 많이 건조되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 조선소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해군력 강화를 위해서는 전략 물자를 운송할 선박 확보가 필수적이다. 현재 80척에 불과한 전략물자 수송선을 250척까지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전략 수송선은 자국에서 건조되고, 자국의 깃발을 달며, 자국 선원이 승선하고 자국 회사가 운항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당장 자국 내 건조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 등에서 건조한 선박도 전략 상선대에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이에 우리 조선업과 해운업에도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수요 몰릴 우리나라 중소형 조선소
RG 발급 문제가 수주 확대 ‘관건’
민간 선주사 육성·금융 지원 통해
경쟁력 회복하고 새 기회 열어야
우리나라 3대 대형 조선소는 이미 2027년까지 건조할 선박으로 독이 꽉 차 있어 당장 미국의 선박 주문을 받아줄 여유가 없다. 그런데 미국이 원하는 선박은 선종과 크기 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중소형 조선소에 기회가 주어진다. 부산에 있는 중형 조선소인 대선조선은 얼마 전 카페리 선박을 성공적으로 건조해 인도한 바 있다. 그런데 중소형 조선소는 선수금환급보증서(RG) 발급을 받지 못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조선소에 건조가 가능한 철판을 사 오도록 선주가 제공하는 선수금을 확실하게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이 적힌 보증장이 RG이다. 조선소가 이를 은행으로부터 발급받지 못하면 선주는 건조 계약에 서명하지 않는다. RG만 발급받을 수 있다면 많은 수주를 할 수 있고 건조를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전략 상선대에 편입될 170척 중 상당수는 미국이 해외에서 직접 매입하거나 연불 방식으로 확보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선주 사업이 발달한 일본과 그리스의 선주들은 큰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선주사는 싼 가격으로 건조된 선박을 많이 보유해 미국에 유리한 조건으로 선박을 매각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선박만 소유하고 있는 회사가 거의 없어 기존 보유 선박을 미국에 매각할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그간 우리 선사는 소유와 운항을 병행해 선박을 보유해 왔고, 선박 건조 가격이 낮은 해운 불경기 때 은행으로부터 건조 자금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저가의 선박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동안 민간 선주사를 체계적으로 육성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중소형 선사에 대한 RG 발급 문제와 선주사 육성이라는 큰 이슈가 미국이라는 외생변수에 의해 다시 한번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중형 조선소를 더 튼튼하게 해 다양한 선종의 선박 수주를 받아 수요를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 진정으로 조선 강국이라면 모든 선종의 선박을 차별 없이 건조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선가 경쟁력에서 뒤처진 우리나라는 벌커 선박과 같은 재래 선박 건조는 하지 않고 있다. 우리 선사들은 오히려 중국에 가서 벌커 선박을 건조하고 그곳에서 수리하는 형국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산업은행을 중심으로 은행권이 모여 RG 문제를 풀어 주어야 한다. RG 구상을 당해 손해를 입은 은행을 구제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일본은 대형 조선소가 선박을 소유하고 불경기 때 조선소에 선박을 발주하는 기능도 한다. 일본 선주사는 1%대의 낮은 이자율로 선박을 건조한다. 우리나라는 5%대의 높은 이자율로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 용선주들이 우리보다 일본 선주의 선박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세계 시장이 개방돼 있는 만큼, 일본 선주사와 우리나라 선주사는 경쟁하게 된다. 이자율 4%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 이에 특별법 등을 통해 선박 건조 시 대출금의 이자율을 낮춰주는 금융지원 정책이 필요하다. 다행히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대형 회사들의 재무 구조가 많이 개선됐다. 과거보다 은행 차입금 의존도가 낮은 지금이야말로 민간 선주사들이 신규 선박을 발주할 수 있는 적기다. 선가가 조금 더 떨어지면 신조 발주를 넣어서 경쟁력 있는 선박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300척 규모의 선주사는 연간 약 5조 원의 매출을 일으킨다. 부울경으로서는 큰 매출이다.
이처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바다에서 큰 변화를 불러올 때 우리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국익을 챙겨야 한다. 전문가들은 미국에서의 조선소 경영이 수익을 내기 어려운 구조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중소형 조선소의 RG 발급’ ‘한국형 선주사의 육성’이라는 간접적인 방식에서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마침, 이 두 가지는 오랫동안 한국 조선과 해운 산업의 숙제이기도 하다. 지금이야말로 그 숙제를 풀어낼 적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