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복종과 항명의 딜레마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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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는 상명하복 원칙을 존립의 근간으로 여긴다. 공동체의 안위를 위해 최상위의 물리력을 행사해야 하는 조직으로서, 명령 체계의 일사불란함과 군율의 엄정함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항명은 그래서 최고의 죄로 다스린다.

그렇다면 상관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하나. 이를테면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 같은 명령이라면? 정당하지 않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은 불법일 수 없다. 나치 잔당들을 재판할 당시, 그들은 상급자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금 독일 군법은 다음과 같은 규정을 품는다.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거나 직무상 목적 이외의 목적으로 내려지는 명령에 따르지 않는 것은 불복종이 아니다.’ ‘범죄가 될 수 있는 명령은 따르지 않아도 된다.’ 상부의 부적절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권리를 일선 장병들에게 보장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명령 거부권이 법제화돼 있지 않다. 영화나 소설 등에서 무능한 상관에 맞서는 주인공의 불복종 행위가 미화되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군대에서 항명은 군사재판 대상으로 중죄 중 중죄이고, 항명자는 대단히 불리할 수밖에 없다. 명백히 부당한 명령인 경우라 하라도 합법적인 거부는 가능하지만 이를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12·3 내란 사태로 대한민국 군인들은 느닷없이 명령 복종과 항명의 시험대에 올랐다. 일대 혼란에 휩싸인 그들의 행태는 그러나 저마다 달랐다. 고민 없이 무조건 명령에 따랐던 군 수뇌부는 죄다 구속된 반면, 헬기의 회항 혹은 방첩사의 태업 등 소극적 항명으로 저항한 일선 장병들은 국민적 환호를 받았다. 지금은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55경비단과 33군사경찰대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한남동 대통령 관저 외곽 경비를 위한 지휘 통제권이 경호처에 있기 때문이다. 항명과 공무집행방해 사이의 진퇴양난 딜레마다. 국정 책임자가 꼬인 매듭을 풀어주는 게 순리가 아닐까 한다.

부당한 상부 지시에 대한 불복종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9일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무죄 선고는 그 정당성을 보여준 판결이다. 군이 땅에 떨어진 위상을 회복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용기 있는 항명으로 명예를 지킨 각성된 군인들을 지켜주는 것이다. 나아가 정당한 항명에 대한 법적 보장을 논의하는 단계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 수 있길 기대한다. 물론 이런 불편한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 게 최선일 테지만.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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