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없으면 자치 없다"… 권한 위임 개헌, ‘혁신’ 기회 [지방자치 30년 균형발전 원년]
민선 내부자들이 본 현주소
복지 등 민생 소극적 대처 우려
주민 참여 한계, 민의 왜곡 걱정
지방분권 매 정권 면피용 이벤트
진영 논리 매몰 개혁 제자리걸음
지역감수성 실종 자치 최대 난관
올해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른 지 30년 되는 해다. 민선 ‘내부자들’이 짚어낸 서른 살 지방자치의 현 주소는 어디일까. 〈부산일보〉는 민선 지방자치 30주년을 맞아 부산 전현직 기초 지자체장과, 광역·기초 의회 의원 12명을 대상으로 익명 인터뷰를 진행했다. 지방자치의 주요 요소를 △권한 분산 △자주 재정 △주민 참여로 압축하고, 민선 ‘내부자들’에게 3가지 항목에 대해 점수를 요청했다.
주민 참여 분야에는 최대 9점 등 비교적 높은 점수가 나왔다. 그러나 지방자치 고질병으로 꼽히는 자주 재정 분야는 3~5점 사이에 머물렀다. 권한 분산 분야는 다소 평가가 갈렸는데 대체로 3~7점 사이였다.
■‘고질병’ 열악한 재정과 권한 부족
예산이 곧 권한인데, 지자체의 재정 자립도가 낮아 지역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역부족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국비에 지방비를 ‘매칭’하기 바쁘고 자율적인 정책은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현직 구청장 B 씨는 “재정은 정부가 다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지자체가 주체적인 행정을 할 수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이어 “중앙 사무를 지방으로 많이 위임 또는 이관하고 있는데, 재정과 권한 배분에 관한 법제화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전직 구청장 C 씨는 “중앙의 예산을 따오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지자체장의 정무적 감각이나 노력 등 개인 역량이 중요하게 작용한다”며 “지방자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공무원 인사권, 지역 사업 결정권 등 지자체도 어느 정도 권한을 갖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권한 분산 분야에 평가자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준 전직 구의원 K 씨는 “지자체는 지역 문제의 70% 이상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며 “다만 문제 해결에 대규모 예산이 필요하다면 정부 의존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열악한 주머니 사정 탓에 복지나 재난 예방 등 민생과 직결된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게 된다는 고백도 나왔다. 전직 구청장 D 씨는 “침수 예방을 위한 하수관거 정비에 지방비 50%가 투입된다”며 “상하수도 개선 사업에 수백억 원을 투입해야 하는데, 기초단체는 매칭이 어려워 사업을 아예 할 수가 없다”고 전했다. 현직 시의원 G 씨는 “복지 정책은 재정자립도가 낮은 부산의 기초단체들은 아예 사업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된다”고 밝혔다.
■주민, 동원 혹은 민원
‘내부자들’은 소셜 미디어와 주민참여예산제 등 참여 통로는 과거보다 더 발전했다고 봤다. 그러나 참여 주민의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이 과정에서 민의가 왜곡될 우려가 높다고 전했다.
주민 참여 분야에 9점을 준 현직 구의원 L 씨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참여 기회가 열려있지만, 절차가 복잡해 소위 ‘아는 사람들만 아는’ 경향이 강하다”며 “참여 독려를 위한 지자체의 노력이 제도 활성화에 관건이다”고 말했다.
전직 구의원 K 씨는 “때로는 선출직 지자체장이나 국가권력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고 참여자 중복 문제가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주민을 민원인으로만 대하는 공직의 태도가 주민 참여의 질적 확대를 더디게 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전직 구청장 E 씨는 “구 행사를 열면 ‘동원된 관중’이 참석하고, 구청장은 이들 이해관계 중심의 왜곡된 민의를 접하기 쉽다”며 “주민을 행정에 계속 참여시켜야 이 한계를 탈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E 씨는 “그러나 주민을 민원인으로만 대하고, 주민 참여에서 비롯된 갈등을 골치 아픈 일로 보는 게 현실”이라며 “"갈등을 조정하고 대화하면서 지방자치가 진화할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갈등만 남는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고 토로했다.
전직 시의원 I 씨는 “지자체가 뭘 하는지 알아야 주민이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다. 정보공개법 등이 있지만 행정은 온갖 이유를 들며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며 “행정은 ‘언론에만 잘 보이면 된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공천제의 득과 실
지방자치를 방해하는 요소로 지목되곤 하는 지방선거 정당공천제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최소한의 자질 검증 역할과 정치 참여 문턱을 낮출 수 있어 제도 자체를 문제 삼아선 안 된다는 의견이 나오는 한편, 공천에 매몰돼 지방자치의 취지에 역행하는 행태가 발생하므로 개선이 필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현직 구청장 A 씨는 “정당은 국민의 믿음에 대해 선출직 후보들을 보증한다”며 “정당정치와 공천제가 없다면 자질이 떨어지는 정치인과 후보들로 넘쳐날 것”이라고 밝혔다. 현직 시의원 H 씨는 “정당공천제가 지방자치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며 “특히 선출직은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지방자치의 주체인데, 정당 소속이라면 사업 실행 가능성이 더 높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현직 시의원 F 씨는 “국회의원에 충성하고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사람이 공천을 받고 있다”며 “자질과 능력 향상, 전문성 배양은 등한시하고, 당선 이후에는 자신과 가까운 주민이나 지지세력 등의 의견에만 귀를 기울여 지방자치의 순기능을 저해한다”고 지적했다.
■지역 감수성 실종 넘어서야
정부의 성과 없는 지역균형발전 노력에 피로를 표하는 한편, 병든 정치로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는 지적도 나왔다. 전직 시의원 J 씨는 "정권마다 위원회 등을 꾸렸지만 막상 공공기관 하나 이전을 못한다. 터져 나오는 지역 요구에 순간 모면할 뿐"이라며 "수도권의 이전 반대에 협상·조정해 내는 게 정치인데, 진영 논리만 남은 지금 지방자치 개혁은 쳇바퀴 돌 뿐이다"고 비판했다.
지역 감수성의 실종이라는 난관 앞에 탄핵 정국 이후 개헌 논의가 변화의 기회라는 시각도 있다. 전직 시의원 I 씨는 "앞으로 수도권 출신이 의사 결정권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중앙의 효율성 중심 논리를 깨기 더 힘들어질 것"이라며 "탄핵 정국 이후 개헌 논의에서 더 많은 지방을 지켜내는 지방자치 혁신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 이대성 기자 nmak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