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찾은 건 흑백사진 1장… 갖은 시도에도 ‘빈손 귀국’ [귀향, 입양인이 돌아온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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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년간 추적한 엄마

첫 발견된 장소 주변 수소문
자신 경찰서 데려간 주민 조우
유일 단서에 희망 부풀었으나
친부모 추적 포기 집으로 돌아가
입양인 대다수 가족 찾기 물거품
고국은 단 한번 손 내민 적 없어

생후 3개월 때 벨기에로 입양된 진명숙 씨는 20년간 친부모를 찾기 위해 7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진 씨는 지난해 입양기록을 찾기 위해 부산 동성원을 방문했다(왼쪽부터). 2009년 진 씨는 자신이 처음 사람들에게 발견된 동래구 한 마을을 방문해 주택 주인인 박호신 씨를 만났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힘썼다. 1993년 한국에 처음 방문한 당시 12세의 진 씨. 본인 제공 생후 3개월 때 벨기에로 입양된 진명숙 씨는 20년간 친부모를 찾기 위해 7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진 씨는 지난해 입양기록을 찾기 위해 부산 동성원을 방문했다(왼쪽부터). 2009년 진 씨는 자신이 처음 사람들에게 발견된 동래구 한 마을을 방문해 주택 주인인 박호신 씨를 만났고,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헤어진 가족을 찾기 위해 힘썼다. 1993년 한국에 처음 방문한 당시 12세의 진 씨. 본인 제공

2023년 여름 부산 남광아동복지원. 적막이 흐르는 사무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직원이 앉았다. 먼지 쌓인 파일 더미에서 직원이 종이 한 장을 찾아 여자에게 넘겼다. 넘겨 받는 여자 손이 떨렸다. 종이에는 그의 첫 입양 기록이 적혀 있었다. 공식 명칭은 ‘요보호자수용의뢰서’로 돼 있었다.

‘진명숙, 여, 생년월일 81년 2월 7일, 생후 3개월가량’. 짤막한 신상 정보 한 줄 아래, 생후 3개월 된 명숙 씨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흐릿한 흑백사진 속 갓난아이 눈동자는 건포도처럼 까맸다.

이 스토리는 진명숙(43) 씨가 20년간 친부모를 찾아 한국을 7번 방문하며 겪은 경험 중 유일하게 화답을 받은 장면이다. 그는 입양국 벨기에에서 현 거주국인 네덜란드 헤이그,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지칠 새도 없이 헤맸다. ‘3개월 명숙’의 사진은 그의 뿌리 찾기 20년에서 얻은 유일한 과거의 실체다.

■한국이 잊은 입양인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에 사는 명숙 씨는 생후 3개월 때 부산 동래구 한 주택 앞에서 발견됐다. 남광복지원과 동성원, 홀트를 거쳐 3살 되던 해 벨기에의 한 가족과 만났다.

그는 자신의 첫 사진 한 장과 만날 때까지 20년이 걸렸다. 12살 때인 1993년 양부모와 함께 처음 한국을 찾은 후 21살부터 친부모를 찾으려고 한국을 7차례 찾았다. 생년월일, 이름 등 짧은 기록에 기대 그는 동래구와 동성원을 헤매며 20~30대를 보냈다. 그렇게 명숙 씨는 40대가 됐다.

한국은 1984년 김포공항에서 벨기에로 가는 아기 수송용 전세기에 그를 태워 보낸 이후 아무런 기억의 노력조차 보내지 않았다. 명숙 씨는 한국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일곱 번의 빈손 귀향

명숙 씨 귀향기는 1993년 양부모와 함께 한국을 처음 찾으면서 시작됐다. 양부모와 연락을 하고 지내던 홀트아동복지회의 김가양(가명) 씨는 “언제든 돌아오면 뭐든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10년이 흘러 21세가 된 명숙 씨는 혼자 한국을 찾았다. 김 씨는 홀트아동복지회에서 퇴직했지만 명숙 씨 연락을 반겼고, 발 벗고 나섰다.

첫 행선지는 동래구의 한 주택이었다. 이 주택은 명숙 씨 입양 기록상 유일하게 선명한 추적의 실마리다. 당시 주택 대문 앞에서 발견된 명숙 씨는 동래경찰서로 옮겨졌다. 명숙 씨는 자신을 처음 발견해 동래경찰서로 데려간 사람을 찾는 일부터 추적에 나섰다.

주택 주인은 이미 바뀌었다. 하지만 전 주인이 아직 같은 동네에 살았다. 박호신(94) 씨였다. “제가 그때 그 아이예요.” 김 씨의 통역을 거쳐 말이 전달되자 박 씨가 명숙 씨를 와락 끌어안았다. 20년 만의 조우였다. 포대기에 감싸져 대문 앞에 버려졌던 아이를 박 씨는 기억했다. “저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국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친가족을 찾은 것 같았어요.”

그 순간, 즉 박 씨와 만난 순간은 명숙 씨 뿌리 찾기의 시작점이 됐다. 박 씨 도움을 받으며 명숙 씨는 다시 8년을 헤맸다. 박 씨 역시 친부모와 이어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는 친부모를 향해 갈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짧은 입양 기록에서 그는 공식적으로 ‘고아’라고 돼 있다.

하지만 모든 추적은 실패로 끝났다. 처음 명숙 씨를 발견해 경찰서로 데리고 간 것은 박 씨의 딸 정 모 씨였지만 당장 만남이 어려웠고, 명숙 씨가 2006년 다시 찾았을 때 박 씨는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

명숙 씨는 2009년 다시 한국에 들어와 동래구의 그 거리를 헤맸다. 몇 날 며칠 거리를 헤매던 어느날, 동래구 한 식당에서 밥을 먹다 식당 주인에게 그가 아는 몇 안 되는 한국어 이름을 꺼냈다. “박호오신?” 어눌한 그의 발음을 용케 알아들은 주인이 반색했다. “그 할머니 여기 근처 살아요.” 주인이 박 씨가 이사 간 집으로 그를 이끌었다. 7년 만의 재회였다.

우여곡절 끝에 박 씨와 그의 딸 정 씨를 만난 명숙 씨는 작은 퍼즐 조각을 찾아냈다. 3개월 된 아이가 대문 앞에 있었고, 2주간 정 씨의 집에서 지냈다는 이야기였다. 잃어버린 한국에서의 4년 중 2주를 이렇게 찾아냈다. 2010년, 명숙 씨는 두 사람의 기억을 토대로 친부모 후보를 추려냈다.

정 씨 집에서 민박하던 여자, 그 여자의 친구, 이웃 여자, 그들의 남편과 아이들. 30년 전 과거 인물을 꺼내 재구성된 이야기는 흐릿했다. 어느 인물과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오직 기억에만 기댄 단서는 불명확했다. 박호신 씨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결국 명숙 씨는 박 씨를 통한 추적을 포기한다. 그는 빈손으로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친부모 추적, 20년째 ‘현재진행형’

명숙 씨 추적기는 친부모를 찾는 수만 명의 해외 입양인들이 겪는 이야기다. 3살에 부산역에서 발견돼 네덜란드로 입양을 갔던 김윤희(53) 씨는 경찰과 입양기관, DNA 검사기관까지 모두 방문한 뒤 남은 방법이 없자 부산역과 국제시장, 초량시장에서 직접 전단과 명함을 돌렸다. 부산 서구 소년의 집 앞에서 발견돼 네덜란드로 입양 간 서준희(50) 씨는 자료 수집을 위해 한국을 9번 찾았지만 소득 없이 돌아갔다.

명숙 씨 역시 언론, 한국과 미국의 DNA 등록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시도했다. 2009년 시민단체 해외입양인연대(GOAL)를 통해 〈부산일보〉에 부모를 찾는다는 기사를 실었고 헤어진 가족 상봉 프로그램 KBS ‘그 사람이 보고 싶다’에도 출연했다. 2009년 2월 20일 자 〈부산일보〉에는 그녀의 이야기가 이렇게 실려있다.

‘지금까지 4차례 한국을 찾았다는 진 씨는 작년 가을부터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더 간절해졌다고 한다. 예전에도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금씩 준비를 했어요. 시간이 더 가면 아예 가족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방송과 신문에 이야기를 실었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었다. 2021년 미국 한 DNA 검사기관에 등록해 둔 그녀의 DNA를 토대로 미국에 있는 이종사촌과 연락이 닿았지만, 사촌은 한국에 남아 있다는 고모와의 연결을 거절했다. 마지막 희망의 끈도 이렇게 사라졌다. “할 수 있는 건 다해보는 거죠.” 그녀가 지난 20년간 한국에서 해온 뿌리 찾기 방식이었다.

명숙 씨가 작은 가능성에 매달리는 동안, 한국은 그에게 단 한 번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다. 화답하지 않는 한국에 수십만 명의 명숙 씨들이 계속 한국에 남은 흔적을 찾아 돌아온다.

“제게 친부모 찾기는 평생의 과업이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영원히 구멍이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아요. 조만간 또 한국에 돌아올 겁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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