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문해력을 다시 생각한다
이진서 고석규비평문학관 관장
흔히 문해력을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문해력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고대, 중세엔 주로 식자들의 인문적 소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문학 텍스트를 읽거나 오늘날엔 사어가 된 라틴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곧 문해력이었다. 근대국가가 만들어진 이후에는 문해력은 모국어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 개념화되었다. 개인적으론 유네스코(UNESCO)의 문해력 정의가 지금 시대엔 가장 합당해 보인다. 유네스코는 ‘다양한 내용에 대한 글과 출판물을 사용하여 정의, 이해, 해석, 창작, 의사소통, 계산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한다.
필자는 최근 지역의 모 문화원과 함께하는 청소년 인문학토론대회를 개최했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과열된 ‘교육열’에 비해 현저히 낮은 ‘문해력’ 탓에 올해 2회를 맞이한 토론대회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말았다. 토론대회에 참여한 아이들의 문제였다기보단 ‘관계자’들의 토론대회 취지에 대한 몰이해와 소통 부재가 빚은 해프닝이었다.
나는 이번 사태를 접하며 새삼 한국 사회의 문해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공고한 학벌주의 사회인 한국에선 학력(學歷)이 실질적인 학력(學力)을 보장하지 못한다. 소위 명문대학을 나와 높은 사회적 위치에 오른 이들 중에도 터무니없는 학력(學力)의 소유자가 많은 이유이다. 긴 글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비단 학령기 아이들만의 문제일까. 그리고 학력(學力) 역시 문해력과 직결되지도 않는다. 학습 수행 능력이 문해력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은 미치겠지만 그것이 문해력의 과정인 이해와 해석, 소통을 보장하진 않는다.
문제는, 낮은 문해력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과 광범위한 폐해에 비해 사람들의 인식은 너무나 안이하다는 데에 있다. 이해와 해석, 소통 능력으로서의 문해력은 개인의 행위성을 넘어 특정 사회구성체의 존립과 관계한다. 지금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소통의 어려움은 온통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로 차고 넘치다 보니 각자의 억울함을 호소하기에만 바쁘다는 데에도 기인한다. 소통의 출발점으로서의 문해력은 이해와 해석이 핵심 요소이다. 그런데 이 ‘이해(理解)’부터가 사실은 쉽지 않다. 이해(理解)는 이해(利害)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각자의 이해(利害)를 바탕으로 자신과 세상을 이해(理解)하기 때문이다.
문해력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학력(學歷)이나 학력(學力)과는 무관하다. 문해력은 그것을 구성하는 지식의 문제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론 우리가 인문적 소양이라고 부르는 것들, 가치관, 삶의 자세에 기대는 바가 크다. 문해력은 상황을 인지하는 힘이다. 맥락적 이해가 가능해야 문해력도 생긴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利害)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딛고 새로운 이해(理解)로 나아가기까지의 여정은 그래서 언제나 지난한 길이다. 인간은 자신의 이해(利害)관계 속에서 인식한 이해(理解)를 상대화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장한다. 그것이 지성의 세계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무엇을 모르는가, 내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과 자기 인식이 동반되지 않는 문해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