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차별 없는 처벌, 처벌 없는 차별
김남석 문화평론가
한 남자가 밥상의 맞은편에 앉은 남자에게 느닷없이 설명한다. “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맞은 편의 남자는 뜨악한 표정으로 듣고 있지만,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그들의 식사 풍경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결코 부인하거나 반발하지 않는다.
헌법 제11조에는 이 외에도 제2항과 제3항이 더 있다. 제2항은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이고 제3항은 “훈장 등의 영전은 이를 받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고, 어떠한 특권도 이에 따르지 아니한다”이다. 하지만 2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는 인정되지 말아야 할 ‘특수계급’이 버젓이 인정되고 있으며 결코 창설할 수 없다는 ‘사회 제도’가 이미 창설되어 있다.
우리 사회 특수계급의 탄생
영화 속 현실과 비슷해져
처벌 없는 차별의 결과물
특수계급으로 부상 중인 여인은 ‘여사’라고도 불리는데, 지금까지 연루된 범죄만 해도 상당하다. 금품 수수, 허위 경력, 논문 표절이 그것이고, 주가 조작, 사기 행위 등에 대해 의심을 받고 있다. 많은 이들은 막연한 의심을 넘어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으며,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여사에 대한 수사와 소환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럼에도 여사는 무사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헌법 제11조 1항을 읊어 준 남자는 검사(우장훈)였다. 그 검사는 공정했고 상식적이었다. 자기가 먹은 밥값은 자기가 계산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오갈 데 없는 남자에게는 밥을 내주었다. 출세에 대한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법과 모략과 결탁으로 출세하고 싶은 마음은 품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하든 간에, 검사로서 범인을 잡고 범죄를 수사하고 그래서 얻은 실적으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우장훈의 세상은 달랐다. 검사가 높게 올라가고 올라가지 않고는 사전에 정해져 있었다. 검사가 하는 노력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변수로 작용했다. 그래서 검사는 끊임없이 발버둥 쳐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검사의 입지는 좁아졌고, 출세는커녕 범죄자에 대한 단죄조차 어려웠다. 그는 내부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범죄자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범죄자 그룹도 부인하기 어려운 강력한 증거를 얻었으며, 그 증거로 세상을 조금 변화시켰다.
지금, 여사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는 남자도 과거에는 검사였다. 그 남자는 제법 의기로운 적도 있었고,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적도 있었다. 검사였던 이 남자 역시 출세에 대한 욕구는 강력했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사회 정의와 맞물려 있기도 했다. 검사였던 그 남자 역시 적들의 소굴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강력한 힘을 얻어 자신이 생각하는 단죄를 내리고자 했다. 그렇게 영화 속 남자와, 현실 속 남자는 비슷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영화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버렸고, 친구의 구속도 감내했다. 하지만 현실 속 남자는 검사의 직위를 이용했고, 여인의 구속을 막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자신의 가족에게, 자신이 속한 그룹에게 더욱 엄중했어야 할 칼을, 타인에게, 자신의 상대에게, 자신에게 불복하는 그룹에게만 휘두르는 참극을 빚어냈다. 영화 속 야인이 된 남자는 공정하고 상식적이고자 했지만, 현실 속 대통령이 된 남자는 편파적이고 이기적이었을 따름이다. 그래서 영화로 이미 구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영화가 경고했던 그 세계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별 없는 처벌’을 하지 않고, ‘처벌 없는 차별’을 한 마땅한 결과였다. 그렇게 우리는 20년은 뒤로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