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심해 갑오징어 탐사] 토실한 갑오징어에 기막힌 한라산 풍경은 덤
'눈길 함부로 걷지 말라, 니가 걸은 이 길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원문을 제대로 기억하는 건지는 모른다. 서산대사가 남긴 말로 알고 있다. 무엇이든 처음은 어렵다. 다만 초행길에서 얻는 즐거움은 전인미답의 새로운 길이 주는 생경함에서 오는 이질감, 그 낯섦의 기쁨. 제주도 심해 갑오징어 낚시 시즌이 막 시작됐다고 했다. 새해 1월 첫 주 평일에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언제나 낚시 떠나기 전의 설렘이 낚시라는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이다.
한림항 너머 눈 덮인 한라산
숙소 서귀포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했다. 오전 8시에 출발해 낮 동안 하는 선상 낚시라 7시에 일행과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다. 갑오징어 원정팀은 모두 4명, 부산광역시낚시협회 김선관 회장, 경기도 부천시 소풍낚시 서정춘 대표, 남상출 월간바다낚시&씨루어 편집장과 기자다. 제주에서는 서귀포에서 신신낚시점를 운영하는 황병수 대표가 합류했다. 오늘의 출항지는 제주 한림항. 서귀포에서 가자면 모슬포를 지나 넉넉잡아 1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고향은 경북 예천이지만, 오래전부터 제주에 자리 잡은 황 대표가 현지 지리에 익숙해서였는지 예정 시간보다 10분 정도 일찍 한림항에 도착했다.
타고 나갈 선상낚싯배는 한림항 빅히트호(선징 오원호)였다. 빅히트호는 이 시기 갑오징어 심해 선상 낚시를 주로 하는데 1월부터 시즌이 끝나는 3월 말까지는 한림항을 근거로 활동한다고 한다.
승선명부를 작성했다. 최근 명부 작성의 원칙은 본인뿐만 아니라 연락할 수 있는 지인의 전화번호도 의무적으로 적어야 한다. 휴대전화 즐겨찾기 1번 아내의 전화번호를 잠시 뜸을 들인 후 기억해 냈다. 아무래도 휴대전화기가 알아서 다 찾아주니 타인의 전화번호를 외울 일이 많지 않다.
갑오징어는 루어로 잡아낸다. 요즘은 새우 모양의 에기에다가 학꽁치포 등을 장착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에기까지 나왔다. 아직 조과를 중하게 여기는 한국 낚시 풍토 때문인지 '많이 잡는 게 선'이라는 원칙에 부합하는 채비다. 기본은 에기. 에기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표면이 매끄럽게 도장된 레이저, 부력이나 음향 효과가 있는 슷테, 에기 등이 다양하게 쓰인다. 두족류 낚시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인지 채비는 한치, 갑오징어, 무늬오징어(흰오징어), 화살촉오징어,호래기 등에 범용이나 혼용으로 사용할 수 있다.
배가 출항했다. 막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제법 파도가 거칠다. 눈 덮인 한라산이 배웅한다. 흰 눈이 쌓인 한라산 정상. 제주는 어쩌면 전부 한라산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첫 번째 포인트에 도착한 빅히트호가 풍닻을 내렸다.
바람과 파도, 흔들리는 수평선
"여기 수심은 75m, 봉돌은 40호(약 150g)를 쓰셔야 합니다." 풍닻이 자리를 잡자 오 선장이 방송을 했다. 풍닻은 낙하산 형태로 물속에서 펼쳐진다. 굳이 닻을 내리지 않더라도 조류를 감싸 안는 풍닻 때문에 배는 바람이나 조류의 영향을 적게 받아 천천히 움직인다. 낚시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며, 자연스럽게 포인트를 넓은 영역으로 탐색하는 장점이 있어 주로 갈치 낚시나 한치 선상 낚싯배는 풍닻을 필수로 사용한다.
오 선장은 가짓줄 채비를 사용하라고 했다. 원줄과 에기를 매달 목줄이 갈라지는 지점을 기준으로 봉돌은 15~20cm 단차를 주고, 채비는 30~50cm 정도 길이를 주면 된다고 했다. 김선관 회장이 건네준 채비를 묶었다. 김 회장은 "오늘같이 파도 때문에 롤링이 심한 날은 봉돌을 바닥에 가만히 대고 있다가 가끔 들면서 챔질하면 무게감이 느껴지는데 그때 올리면 된다"고 오랜만에 나온 기자에게 낚시 요령을 설명해 주었다.
삼봉에기를 목줄 끝에 달았다. 목줄은 3호. 삼봉에기는 하이브리드 채비다. 에기의 등 부분에 학꽁치포나 꽁치, 삼치살, 갈치살 등 어종에 따라 다양한 생미끼를 장착한다. 갑오징어 낚시에서는 한번 감아두면 내구성이 좋은 마른 학꽁치포를 썼다. '삼봉'은 미끼를 감다는 뜻으로 바느질할 때 지그재그로 박는 기법을 일컫는다. 삼봉에기의 정확한 일본어는 에사마키(エ サ巻き)슷테이다. 에사마키는 두루마리, 감은 것이라는 뜻이고, 슷테는 추가 노출되지 않은 에기를 말한다.
예상보다 너울이 심했다. 배가 파도에 롤링할 때마다 족히 30~40cm 정도는 오르락내리락했다. 게다가 수심 70m가 넘는 깊은 곳 바닥에서 하는 낚시라 어신도 잘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오랜만에 하는 낚시라 감도 오지 않았다. 멀리 기운도 심해졌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멀미할 때는 멀리 보아라' 초릿대를 바라보는 눈길을 거두고 고개를 들어 멀리 눈모자를 쓴 한라산을 보았다. 그래 고기가 물지 않아도 제주 바다에서 이런 풍경의 한라산을 볼 수 있는 행운아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마음을 비웠다. 한라산 백록담 위를 막 지나온 차가운 바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두 자릿수 염원은 오후 4시까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입질이 왔다. 제법 튼실한 갑오징어였다. 귀한 고기라 뜰채를 대 조심스레 갈무리했다. 이제야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도권에서 온 부부 조사는 자주 입질받았다. 두 사람은 제주도의 갑오징어 프로가 만든 수제 낚싯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몸체는 튼튼하고, 초릿대 끝부분만 낭창한 9:1 낚싯대였다. 자존심 강한 이가 낚시꾼이라지만, 어떻게 잡는지 물었다. "바닥에서 한 뼘 정도 추를 들어줍니다. 그러면 초릿대에 입질이 옵니다. 오늘은 너울이 심해 느끼기 힘든데 살짝살짝 들어 무게를 느끼죠." 또 13초에 한 번은 반드시 추를 바닥에 내리라고 했다. 바닥 지형이 배가 조류나 바람에 이동할 때마다 다르니 바닥에서 한 뼘을 반드시 유지해야 갑오징어가 문다고 했다. 각각 잡은 갑오징어는 개인별로 마련된 어창에 보관하는데 이분들은 벌써 두 자릿수를 넘겼다.
깊은 수심이라 전동릴로 채비를 바꾼 김선관 회장이 갑자기 입질받기 시작했다. 수심 깊은 곳이나 채비를 감아 들이는 시간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어깨가 아프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전동릴은 신세계였다. 김 회장은 자주 에기를 바꾸며 갑오징어를 걸어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폭증한 입질의 비결은 에기에 있었다. 이날 제주도 갑오징어 특효라는 삼봉에기는 신통찮았다. 대신 2.5호 정도의 표면이 매끈한 레이저 에기나, 래틀(딸랑이)이 들어있는 슈퍼브라이트하이어필 에기가 갑오징어의 맘에 쏙 들었던 모양. 에기를 바꿀 때마다 입질을 받는 김 회장에게 전갱이색 소형 에기 하나를 빌렸다. 그리고 네 번째 갑오징어를 드디어 올렸다.
김 회장은 기자에게 가려쳐 준 대로 낚시 초기 많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부부조사와는 다른 방식을 썼다. 추를 아예 바닥에 두고, 배가 롤링할 때 추가 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스풀을 풀었다. 그러면 배가 흔들려도 추는 움직이지 않아 갑오징어 입질을 받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렇게 해도 고기를 올라왔다. 다만, 배가 이동을 하니 줄이 계속 늘어지는 단점은 있었다.
올해는 흥겹게 살자 낚시도 일도
빅히트호 오원호 선장은 궂은 날씨에도 유쾌한 서비스로 조사들을 격려했다. 거의 트레이드 마크는 입질이 왔을 때 "그래 걸려 들었어~"라고 방송하는 멘트다. 그 말을 들으면 내가 갑오징어 입질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5차례 이상의 커피 서비스와 안 무면 바로 풍을 걷어 올리는 과감함도 여느 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제주도에 올 때마다 이 배를 탄다는 단골조사는 밥이 맛있다는 칭찬도 했다. 오 선장의 부인이 모슬포에서 식당을 하는데 배에서 제공하는 점심이 그 솜씨라서 너무 맛있다는 것이다. 멀미로 고등어찌개를 제대로 맛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파도는 조금 잠잠해졌다. 옆에 부부조사가 건넨 멀미약이 효과를 발휘하는지 멀미도 진정됐다. 이제 갑오징어만 쑥쑥 올라오면 되는데 그 입질이 참 아쉬웠다. 제주 심해 갑오징어낚시는 3월말까지는 시즌이라고 했다. 신발짝 갑오징어를 부부조사의 부인이 쑥 뽑아냈다. 무려 1kg은 될만한 놈이라고 남상출 바다낚시 편집장이 눈계측해주었다.
4시가 조금 넘자 철수가 결정됐다. 마지막까지 투혼을 발휘해 6마리를 낚았다. 배 전체에서 중하위권은 기록했다. 그래도 원정대가 잡은 갑오징어를 다 모으니 한 바구니 가득찼다. 잡은 갑오징어는 황 대표의 부인이 점심 때만 운영하는 서귀포시청 근처 식당에서 요리해 먹었다. 눈한라산 기운을 듬뿍 머금은 제주 심해 갑오징어는 찰지고 맛났다.
다음날 철수를 하는데 공항에서 한 낚시꾼을 만났다. 이틀 동안 갑오징어 낚시를 했는데 전날(원정팀이 갑오징어 낚씨 한 날)은 제대로 못 잡고 철수 당일은 30마리 이상 잡았다고 했다. 역시 우리만 못 잡은 게 아니었다. 물때와 날씨 탓이었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걸면 신발짝이라는 2월 제주 갑오징어를 만나볼까. 자주 항공사 예약 페이지를 열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한림항(제주도)=글·사진 이재희 기자 jaehee@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